2017년 10월의 마지막 날. 프로배구 여자부 GS칼텍스의 베테랑 세터 정지윤(37)이 정든 코트를 떠났다. 흥국생명(1998~2005년)을 거쳐 2005년 GS칼텍스 유니폼을 입은 정지윤은 2007년 실업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성남시청(2007년)→수원시청(2008~2010년)→양산시청(2011~2013년)에서 뛰다 2013년 GS칼텍스로 다시 돌아왔다. '복덩이'였다. 정지윤은 2013~2014시즌 GS칼텍스의 6년 만의 챔피언 등극을 이끌었다. 네 시즌 주전 세터로 활약한 정지윤은 이제 '제2의 인생'을 열게 됐다.
하지만 정지윤의 은퇴식은 상대 팀의 딴지로 취소될 뻔했다. 이날 GS칼텍스는 2세트가 끝난 뒤 5분간의 휴식시간을 활용해 정지윤 은퇴식을 마련했다. 체육관에 암전을 시킨 뒤 정지윤에게만 불빛을 비춰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게 기획했다.
한데 기업은행, 정확히 얘기하면 이정철 감독은 버럭 화를 냈다. 경기 중 불이 꺼지면 선수들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이 감독의 논리였다. 이 감독은 이날 경기 전 GS칼텍스 관계자에게 거세게 항의했고 경기감독관과 심판위원장에게 재차 항의했다. 어창선 경기감독관은 암전 행사가 열리는 것이 경기 진행에 문제가 되는지 판단했고 연맹, 방송관계자와 상의한 끝에 문제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감독이 펄쩍 뛸 정도로 GS칼텍스가 규정을 위반한 것일까. 아니다. KOVO 운영요강에는 암전에 의한 위반 규정이 없다. 또 GS칼텍스는 절차도 지켰다. 경기 전날 연맹과 기업은행에 사전 공지했고 홈 경기 주최측으로서 마땅히 할 만한 행사를 했다는 것이 배구계 관계자들의 목소리다. 특히 선수들의 경기력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식전 행사도 취소하고 정지윤의 은퇴식만 진행했다. 당초 4분으로 예상했던 은퇴식이 약간 길어져 5분 정도 이어졌는데 브레이크 타임을 소화한 것일 뿐 전혀 경기 진행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방송사도 GS칼텍스 레전드로 남게된 정지윤의 은퇴식을 중계화면에 담았다. "암전이 경기력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 감독의 논리에 접근해보면 기업은행과 GS칼텍스는 동일한 조건이었다. 설사 경기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기업은행만 피해를 보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장충체육관은 GS칼텍스의 안방이다. 안방의 주인이 야심차게 기획한 행사를 남의 집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권한이 없다. GS칼텍스가 경기 중 암전 행사를 진행한 건 처음이 아니다. 2015~2016시즌 홈 개막전에서도 초청가수 공연을 진행했다. 당시 상대 팀이었던 현대건설에선 전혀 불평을 내놓지 않았다.
가장 아쉬웠던 건 이 감독과 기업은행의 마음가짐이었다. 정지윤은 상대 팀 선수이기 이전에 이 감독의 선수 출신 후배다. 물론 이 감독의 성품을 보면 후배의 은퇴를 마음 속으로 축하해줬을 것이다. 그래도 13명의 현역 사령탑 중 두 번째 고참이 된 이 감독이 까마득한 후배의 마지막 뒷 모습을 앞에 나서서 박수쳐주는 모습이 더 괜찮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또는 사전협의를 거쳐 기업은행과 GS칼텍스 선수들이 함께 도열해 정지윤을 코트로 맞아주는 깜짝 이벤트를 제안했다면 이 감독은 큰 그림을 그리는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배려 실종은 구단 프런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소속 팀 선수의 은퇴가 아니라고 하지만 꽃다발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 의무는 아니다. 다만 배구를 포함해 은퇴 선수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부족한 한국 스포츠계에 기업은행이 진정한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면 오히려 팬들에게 기업은행이 더 박수받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모기업 이미지는 더 향상됐을 것이다.
스포츠2팀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