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과 한로(8일)를 지나자 사방에 가을 느낌이 완연하다. 가을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도 내려가 산천의 수목은 월동준비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들의 겨울 채비를 우리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감상한다. 자연이 건네는 계절의 보너스인 셈이다. 가을이 한껏 무르익은 시절, 우리의 산하는 만산홍엽 그 자체다. 기상청은 산 전체 면적의 20%가량이 물들었을 때를 단풍 시작일로, 단풍이 전체 면적의 80%선에 이를 때를 단풍 절정일로 잡고 있다. 올해는 지난 달 22일 설악산 정상부에 내려앉기 시작한 고운 단풍이 하루 20km씩 남하하며 오대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 등 전국 주요 단풍명산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중부권은 이번 주말, 남부권역에서도 다음 주말부터는 고운단풍의 자태를 마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가을 잠시 바쁜 일상을 접고 산하에 내려앉은 가을 색에 젖어보는 것은 어떨까. 만추에 찾아볼만한 대표적 단풍명소를 소개한다. 글·사진 =김형우 문화관광전문 기자 hwkim@sportschosun.com
◆설악산 '주전골'
국내 최고의 단풍명소다. 금강산을 거쳐 남하한 단풍이 지난 달 22일 설악산에 첫 단풍 소식을 알렸다. 올 설악의 단풍은 큰 일교차와 일조량 덕분에 예년 보다 4~5일 가량 빨리 물들기 시작했다.
장중한 설악산은 곳곳에 단풍명소를 거느리고 있다. 그중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미도 빼어난 천불동, 가야동, 수렴동, 백담사계곡 등의 단풍이 특히 볼만하다. 하지만 이들 계곡은 등산로도 길고 노약자가 접근하기에는 만만치 않다. 따라서 산책하듯 가벼운 기분으로 다녀올 만큼 접근성이 뛰어난 주전골이 좋은 대안이 된다.
주전골은 한계령 중턱에서 용소폭포를 거쳐 오색약수터까지 흘러내린 골짜기를 이른다.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의 남사면과 점봉산의 북사면 계곡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 때문에 골산(骨山)인 설악산의 섬세함과 육산(肉山)인 점봉산의 웅장함을 겸비한 풍광을 지니고 있다.
주전골의 산행은 오색약수보다 한계령 중간 지점의 도로변에 있는 매표소부터 시작하는 게 수월하다. 완만한 내리막길로 이어진 오색약수까지 3.2㎞에 이르는 코스를 두어 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특히 산행코스가 짧고 평탄해 누구라도 단풍산행을 즐길 수 있다.
매표소를 지나 비탈길에 내려서면 주전골의 풍광이 펼쳐진다. 5분여 거리에 용소폭포가 나오고 십이폭포, 선녀탕, 만물상, 금강문 등의 절경이 이어진다. 과거 폐쇄됐다 개방된 흘림골의 비경도 빼놓을 수 없다. 트레킹의 종착지 오색약수에서 목을 축이는 것으로 산행을 마무리 한다.
◆오대산 '월정사~두로령'
편안한 가을색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산이다. 대표적 육산인 오대산은 강렬한 원색미 보다는 수수한 듯 다양한 오색단풍이 특징이다. 수종이 풍부한 탓이다. 때문에 육산 특유의 부드럽고 완만한 트레킹 코스에서 만나는 알록달록, 노랗고 잿빛 섞인 가을색이 안정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오대산에서는 북대사 고갯길이 압권이다. 월정사~상원사~북대사~두로령~홍천내면 분소에 이르는 단풍 길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담아낸다. 446번 지방도는 그야말로 명품길이다. 이 길은 국내 몇 안 되는 비포장 정규 지방도로다. 그중 오대산 월정사를 출발해 북대사~두로령(1300m)을 거쳐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잇는 약 25km 구간은 오색단풍과 낙엽을 밟으며 걸을 수 있는 운치 있는 숲길이다.
첫 구간은 '월정사~상원사'를 잇는 9km의 완만한 선재길이다. 선재길은 평창 진부면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잇는 천년 옛길로 과거 화전민과 승려들이 주로 이용한 길이다. 숲길 트레킹은 월정사 일주문부터 시작된다.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1.2km)을 거쳐 오대산에 들어서게 되는데, 전나무 숲길 따라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 압권이다. 가람을 비켜나 월정사 부도 밭을 지나면 선재길이 시작된다. 월정사에서 상원사 구간은 오르막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경사가 완만하다. 계곡 따라 이어진 길 곳곳에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조선시대 세조와 문수보살의 전설이 깃든 상원사에서 이어지는 '상원사~북대사~두로령~홍천 내면 매표소'에 이르는 16km 구간 역시 단풍트레킹코스로 그만이다. 상원사에서 북대사, 두로령에 이르는 길(6km)은 살짝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다양한 수종을 자랑하는 식생의 보고답게 다채로운 자연의 가을빛깔을 접할 수 있다. 특히 굽이를 돌때마다 가을이 내려앉은 오대산 능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세를 둘러보며 느릿하게 두어 시간 발길을 옮기자니 북대미륵암이 나선다. 잠시 다리쉼을 했다가 내처 걸으면 어느새 두로령이다. 행정구역이 평창에서 홍천으로 바뀌는 여기부터가 진경이다. 두로령에서 내면 명개리까지 약 10km 구간은 오색단풍이 산 능선과 계곡을 곱게 물들인다. 두로령 고갯마루(1310m)에 서면 오대산의 연봉들은 파스텔톤의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고, 계곡은 붉은 빛깔을 토해내며 장관을 이룬다.
오대산 월정사를 출발해 북대사~두로령을 거쳐 홍천군 내면 명개리 매표소를 잇는 약 25km 구간은 보통 걸어서 7시간쯤 걸리지만 느릿한 걸음이면 8~9시간. 하루해면 충분하다. 상원사부터 명개리 내면 매표소까지 걷는다면 5~6시간 정도 걸린다.
◆덕유산 '향적봉~구천동'
덕유산의 단풍은 시기적으로 설악과 비슷하다. 비록 반도의 남부에 자리하고 있지만 해발고도가 높아 단풍의 남하 속도는 오대산, 설악산에 비견된다.
10월 하순, 가을이 내려앉은 무주 덕유산은 황홀한 단풍 트레킹 코스가 펼쳐진다. 특히 '무주리조트~설천봉~향적봉~백련사~구천동 관광단지'에 이르는 덕유산 단풍 산행코스는 '만추~겨울'에 이르는 계절의 서정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정상 향적봉 일원 고사목 군락지 사이로 을씨년스런 칼바람이 불어대고, 1000m 아래 산자락에는 현란한 단풍의 향연이 펼쳐진다.
덕유산 트레킹의 매력은 노약자도 쉬엄쉬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1530m)까지 오를 수 있고, 설천봉에서 정상 향적봉(1614m)까지는 완만한 계단길로 20여 분이면 닿는다.
향적봉 인근 남덕유 능선의 중봉(1594m) 또한 구상나무 고사목 군락지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덕유산 능선이 펼쳐진다. 정상 향적봉에서 백련사 방면 8부 능선(1300m)까지는 앙상한 가지에 낙엽 밟히는 소리가 산행의 묘미를 더한다. 벌써 겨울이 찾아들었나 싶을 만큼 단풍조차 구경할 수 없는 구간이다. 반면 거칠 것 없이 시선도 툭 트여 산 아래 붉게 물든 주변 능선을 감상하기에는 그만이다.
굴참나무, 주목, 사스래나무, 신갈나무 등이 어우러진 1000~1300m 구간에는 곱게 물든 단풍의 흔적이 남아 있고, 1000m 아래로 내려가면 덕유산 오색단풍의 진면목이 펼쳐진다. 이처럼 고운 단풍은 신라고찰 백련사로 향하며 절정에 이른다. 사찰 주변은 온통 빨강, 노랑, 주황의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백련사~구천동계곡'은 무주 단풍의 진수를 맛보기에 최적지이다. 특히 백련사 일주문을 지나 구천동 매표소에 이르는 2.5km 구간은 정감 넘치는 오솔길로 굽이마다 구천동계곡의 절경 속에 곱게 물든 단풍이 비경을 이룬다.
◆속리산 '오리숲'
속리산도 단풍 명산이다. 속리산의 단풍은 수줍은 듯 수수하다. 설악이나 내장산의 단풍처럼 화려하기 보다는 오색단풍 특유의 은은한 느낌이 더 강하다.
속리산은 '오리(五里)숲'의 단풍과 낙엽길이 운치 있다. 매표소에서 법주사 입구까지 이어진 오리숲은 숲의 길이가 '5리'에 이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옆으로 수령 100~200년은 족히 됨직한 소나무, 떡갈나무, 참나무가 아름드리 터널을 이루고 있다. 실제 길이가 절집까지 5리(2㎞)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찰을 비켜나 세심정으로 향하는 길까지 치자면 숲길은 10리를 훌쩍 넘는다.
예로부터 속리산은 진정 속세와 단절이 가능한 명산으로 꼽혀왔다. 그 초입인 오리숲을 '속리(俗離)', 세상과의 이별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삼았다. 특히 오리숲을 지나며 이따금씩 맞게 되는 낙엽비에 마음의 찌든 때와 세속의 인연을 씻어내고 산문에 들었다. 속리산 오리숲길 기행은 말티재 부터 시작된다. 만추지절 말티재는 굽이 마다 오색 가을빛이 내려 앉아 장관을 이룬다. 특히 이른 아침 자욱한 안개를 뚫고 말티재를 넘는 드라이브는 환상에 가깝다. 고갯길 아래 속리산 들머리에 다다르면 속리산의 얼굴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을 만난다.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리숲 산책에 나선다. 가을 성수기 속리산은 인파로 넘쳐난다. 하지만 이른 아침의 호젓함은 가히 속세를 떠나온 듯하다. 무릇 숲길의 운치를 가장 실감할 수 있을 때로는 여명이 깃들고 숲 속에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 즈음이다. 요즘 같으면 오전 7~8시 사이다.
아침 햇살이 부스스한 안개 숲을 뚫고 쏟아지는 숲길의 운치는 로맨틱하다. 살짝 이슬이 내려앉은 낙엽과 잎새는 더욱 생기 있게 빛나고 마치 부드러운 낙엽 카페트를 걷기라도 하듯 발걸음 또한 가뿐하다.
법주사 매표소를 지나며 오리숲의 진수가 펼쳐진다. 아름드리 숲길 한쪽 물가 옆으로 난 탐방로도 운치 있다. 법주사 구경을 잠시 미루고 세심정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자면 고즈넉한 숲길 한편으로 상수원이 있어 이른 아침 펼쳐지는 물안개를 마주할 수 있다. 무채색의 물안개가 오렌지 빛 아침 햇살에 물들어 가며 수면을 덮어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법주사에서 세심정 휴게소까지는 걸어서 1시간 남짓이 걸린다. 휴게소 앞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여기서 문장대(1054m)와 정상인 천황봉(1058m)으로 오르게 된다. 왕복 5~6시간이면 족하다. 속리산의 또 다른 이름처럼 불리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고찰이다.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法住)'는 뜻을 가진 명찰로 고려 공민왕, 조선 태조, 세조 등 국왕의 기도처가 됐던 곳이다.
◆지리산 '뱀사골'
지리산에는 피아골 등 단풍 명소가 즐비하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뱀사골이다. 특히 지리산 권역에서 단풍의 자태로는 뱀사골을 꼽을 만하다.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북사면에 위치한 뱀사골은 14km 길이의 계곡 곳곳에 굴뚝소, 병소, 뱀소 등 빼어난 비경도 담고 있다.
뱀사골 단풍은 단풍나무, 활엽수 등의 잡목이 어우러진 '오색 단풍'으로, 설악 단풍의 화려한 자태도 함께 뽐낸다. 대체로 뱀사골 입구 반선에서 오룡소, 탁룡소, 병풍소를 지나 간장소 까지가 볼만한데, 맑은 담에 투영된 파란 하늘과 붉고 노란 단풍의 조화가 멋진 풍광을 담아낸다.
뱀사골은 다양한 산행코스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반선~뱀사골 대피소~화개재~삼도봉~노고단~성삼재 까지 8시간이면 오를 수 있고, 화엄사까지는 1박2일을 잡아야 한다. 또 반선~뱀사골 대피소~화개재~토끼봉~연하천 대피소~벽소령 대피소~세석 대피소~장터목~천왕봉~중산리로 이어지는 가을 등산로는 2박3일의 종주 코스로 애용되고 있다.
특히 뱀사골~삼도봉~임걸령 삼거리~피아골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8시간 산행코스는 지리산 단풍의 대명사로 꼽히는 피아골과 뱀사골을 한꺼번에 아우를 수 있다. 뱀사골 트레킹의 장점은 완만한 숲길에 있다. 출발 기점 7~9km 구간의 급경사 지역만 빼고는 등산로가 완만하다. 뱀사골 단풍만을 보려면 뱀사골 입구에서 오룡소-탁룡소-병풍소를 지나 간장소 까지만 들르는 왕복 4~5시간 코스를 추천한다.
한편 만추에 떠나는 지리산 기행은 가을걷이만큼이나 풍성하다. 만산홍엽 단풍 구경에 골골이 담겨 있는 삶의 풍경들이 정겹기만 하다. 특히 지리산 관광의 허브격인 전북 남원은 '소설'의 고장으로 가을의 서정을 듬뿍 채울 수 있는 소재 또한 풍성하다. 춘향전, 흥부전, 변강쇠타령, 혼불 등 단풍 나들이와 곁들여 소설과 소리의 배경을 찾아 떠나는 예술기행이 가을의 운치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