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될 땐 뭘 해도 된다. 그런데 안될 땐 뭘 해도 안된다. 그게 야구인 것 같다."
이정도의 심도있는 코멘트를 하려면 산전수전 다 겪어본 베테랑이어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 엘리트로 살아온 선수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수 있다.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의 경기가 열린 지난 주말 부산 사직구장. 경기 준비를 하던 롯데 이우민(35)이 꺼낸 말이다. '타격감이 좋아 보인다'는 말에 돌아온 대답이다. 이우민의 야구 인생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가슴에 사무칠 말이다.
시즌 초반 이우민이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13일 SK 와이번스전까지 11경기에서 타율 4할7리(27타수 11안타), 1홈런, 3타점을 기록했다. 하위 타순의 핵으로 활약했다. 외야 수비는 좌익수, 중견수 가리지 않는다.
사실 시즌 개막 전 이우민의 자리는 없었다. 김문호-전준우-손아섭로 짜여진 외야 라인이 확고했다. 3월 31일 NC 다이노스와의 개막전부터 4일 넥센 히어로즈전까지 4경기 연속 출전은 했지만, 타석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경기 후반 대수비로만 나갔다는 뜻이다. 그러다 좌익수 김문호가 목에 담 증세를 호소했고, 6일 넥센전에 선발로 기회를 잡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홈런 포함 3안타. 이후 6경기 연속 안타 행진이다. 김문호가 목 통증이 완화됐다고 했지만 조원우 감독은 "이우민이 잘하는데 김문호를 넣을 이유가 없다"며 기회를 줬다.
중견수 전준우가 최근 옆구리 부상을 당해 최소 4주를 쉬어야 한다. 그래서 이우민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외야 수비가 워낙 좋기에 중견수로 자리를 옮겼다. 전준우의 부재가 뼈아픈 롯데지만, 이우민이 지금과 같은 활약을 이어준다면 전준우가 돌아올 때까지 잘 버틸 수 있다. 동료이자 후배의 부상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어찌됐든 이우민에게는 기회다.
2001년 롯데에 입단해 지난 시즌 후 우여곡절 끝에 첫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에 FA 신청조차 못해보고 롯데와 연봉 6000만원에 도장을 찍었다. 올시즌을 잘 마치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FA 꿈을 이룰 수도 있다.
사실 이우민이라는 이름이 아직은 어색하다. 2015년 시즌을 앞두고 이승화에서 이우민으로 개명을 했다. 뭔가 해볼만 하면 다치는 연속된 불운. 이를 안타깝게 지켜본 부모님의 권유로 이름까지 바꿨다. 오직 야구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니, 야구를 잘하기 이전에 온전한 몸으로 한 시즌을 뛰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야 뭐라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우민의 야구 패턴은 늘 비슷했다. 거의 매년 스프링캠프 최고의 화제 인물이었다. 바뀌는 지도자들마다 팀의 주축으로 활용하겠다고 치켜세웠다. 최고 수준의 외야 수비에, 캠프에서는 타격도 좋았다. 2007년 75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1리를 기록했을 때의 잠재력을 지도자들이 잊지 못했다. 이우민의 까진 손바닥은 단골 뉴스였다. 그만큼 열심히 하는 선수였다. 모든 지도자들은 묵묵히 성실하게 훈련에 몰두하는 이우민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면 부담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빈타에 허덕였다. 2군에서 절치부심 준비를 하다가, 1군 빈자리에서 좋은 활약을 한다 싶으면 다쳤다. 무릎, 발목 등이 매년 성치 않았다.
그렇게 불운하기만 하던 이우민의 2017년 출발이 매우 좋다. 그동안의 악몽을 단 번 날려버릴 기세다. 이우민은 지난 십수 년간 성적과 비교해 팬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보내준 선수였다. 한 마디로 애증. 이제 이를 팬들의 애정으로 바꿀 기회가 왔다.
"안될 땐 뭘 해도 안된다"는 말. 야구가 안될 때, 그걸 이겨내기 위해 뭐라도 해봤다는 뜻이다. 무기력함이 아니라, 그만큼 피눈물을 많이 흘려도 정복하기 쉽지 않은 게 야구라는 말이다. 지금의 상승세가 언제까지 쭉 이어질 수는 없다. 잠깐의 슬럼프가 왔을 때 또 기죽을 상황이 오면, 이우민의 야구 인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 때 필요한 게 비난이 아닌 관심과 격려다. 그러면 우리는 느지막이 자신의 야구 인생을 활짝 펼칠 새로운 스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김 용 기자 aweso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