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는 오직 결과로 말한다. 불청객 부상과 부담감은 개인의 몫이다. 외롭고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 변명의 여지는 없다. 숙명이다.
빙속 여제 이상화(28·스포츠토토), 그는 이중의 부담을 안고 삿포로행 비행기에 올랐다. 첫째는 종아리 부상, 둘째는 과도한 기대감이다.
이상화는 아팠다. 지난해 말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1차 대회에서 오른쪽 종아리 근육 미세 파열 부상을 했다. 쉬었어야 했는데 세계선수권 대회 출전권 때문에 4차 대회까지 출전을 강행하다 상태가 악화됐다. 올 초 줄줄이 다가온 국제대회를 앞두고 마냥 쉴 틈이 없었다. 재활 끝에 지난 10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2017 ISU 스피드스케이팅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주 종목 500m에서 37초48의 시즌 최고 기록으로 은메달을 땄다. 하지만 상처 뿐인 영광이었다. 통증이 심해져 이어진 여자 1000m 출전을 경기 당일 포기해야 했다.
과도한 기대감은 또 다른 부담이다. 이상화에 대한 기대치는 하늘 꼭대기에 있다. 사람들은 금메달을 따야 '역시~' 한다. 그 아래면 은근 실망한다. '빙송 여제'에게도 모든 대회는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 차근차근 밟아 올라야 할 또 하나의 산일 뿐이다. 게다가 부상까지 안고 있다면 부담은 백배다.
그런 탓이었을까. 이상화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일본 입국 시 "현재 종아리 상태가 많이 안 좋다. 아시안게임에서 무리하지 않겠다. 즐기다 가겠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출발선상에 서는 순간 모든 선수는 신경은 곤두선다. 경쟁 또 경쟁. 시선은 엔드라인을 가장 먼저 통과하겠다는 의지, 그 하나에 고정된다.
경기가 다가올수록 부담감은 눈덩이 처럼 커졌다. 1000m 경기를 하루 앞둔 훈련장에서 만난 이상화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지막 훈련을 마친 뒤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런 모습을 뒤로한 채 이상화의 삿포로 축제가 막을 올렸다. 20일 일본 홋카이도현 오비히로 오벌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1000m에서 1분16초01로 아시아 기록을 경신했다. 종전 기록은 2015년 1월 중국 장훙이 세운 1분16초51. 그럼에도 메달 수확에는 실패했다. 더 빠른 세명의 경쟁자가 있었다.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1분15초19)와 다카기 마오(1분15초31), 중국 장훙(1분15초 75)에 밀린 4위였다.
기대감을 거두기는 이르다. 주 종목인 500m가 남았다. 21일 같은 장소에서 레이스를 펼친다. 비록 부상과 부담의 이중고와 싸우고 있지만 이상화는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과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잇달아 금메달을 목에 건 대한민국 빙속의 자존심이다.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이상화가 주춤한 사이 경쟁자들의 도전이 거세졌다. 특히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 고다이라는 밴쿠버(15위)와 소치(5위) 대회에서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2년 동안 유학한 뒤 기량이 크게 발전했다. 올 시즌 출전한 6차례 월드컵에서 단 한 차례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세계선수권에서도 일본 신기록(37초13)을 세우며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상화는 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과 유난히 인연이 없었다. 올림픽을 비롯해 세계선수권 등 모든 대회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던 이상화는 2007년 장춘 대회에서 은메달, 2011년 알마티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는데 그쳤다. 과연 이상화가 이중고를 극복하고 삿포로 대회 500m에서 정상에 설 수 있을까. 운명의 날이 밝았다.
삿포로(일본)=김가을 기자 epi17@sportschosun.com
◇이상화, 고다리아 나오 프로필
=이상화(대한민국)=-=고다이라 나오(일본)=
=1989년 2월 25일=생년월일=1986년 5월 26일
=1m68, 55kg=신체조건=1m65, 60kg
=36초36=500m 최고 기록=37초13
=2010년 밴쿠버 500m 금메달, 2014년 소치 500m 금메달=주요 기록=2017년 세계선수권 금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