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롯데를 장악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상대로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SDJ코퍼레이션 대표)이 판세를 뒤집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정을 나누는 민족 대명절인 설에도 롯데가(家)는 경영권 쟁취를 위한 가족간 싸움에 휴전이 없었다. 신 대표가 지난 9일 일본의 웹사이트에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인터뷰 동영상을 공개한 것. 이 동영상에서 신 총괄회장은 롯데그룹의 후계자는 장남인 신동주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동영상은 신동주 대표가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했던 내용이 대부분이라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설 즈음에 공개했다는 점과 일본 롯데홀딩스 종업원을 타깃으로 한 일부 내용은 신동빈 회장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도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동주, 설에 아버지 모시면서 인터뷰 동영상 공개
신동주 대표는 지난 9일 일본의 '롯데 경영 정상화를 요구하는 모임' 홈페이지(http://www.l-seijouka.com)에 '롯데 창업자 신격호의 롱(긴) 인터뷰'라는 제목으로 신 총괄회장의 16분 20초 분량의 인터뷰 동영상을 공개했다. 이 홈페이지는 SDJ코퍼레이션 측이 경영권 분쟁 이후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개설한 곳이다.
동영상은 일본어로 진행된 인터뷰로 총 12개 질문에 신 총괄회장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주요 내용인 롯데그룹 후계자에 대해 '경영권 문제로 롯데가 흔들리고 있다. 롯데홀딩스의 후계자에 관한 생각을 들려 달라'는 질문에 신 총괄회장은 "당연히 장남 신동주가 후계자이다. 이는 일본과 한국에서는 상식이다. 다른 사람으로 해버리면 모두 신용을 잃게 된다"고 답했다.
나머지 11개 질문은 신격호 창업주의 롯데그룹 창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껌으로 롯데를 일구게 된 과정과 평소 경영 철학에 대해 털어놨다. 특히 신 총괄회장은 제품과 직원에 대한 내용을 강조했다.
동영상 속 신 총괄회장은 전반적으로 상당히 건강한 모습이었고,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현재 서울가정법원에서 진행 중인 신 총괄회장의 성년후견인 지정 심리에 직접 출석했듯이, 이번 인터뷰 동영상을 통해 다시 한 번 본인의 정신건강 논란을 끝내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대중을 상대로 동영상을 공개해, 법원에서 신 총괄회장에게 성년후견인 지정을 할 가능성을 일찌감치 차단하려는 것으로도 보인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넷째 여동생 신정숙씨가 신청한 신 총괄회장의 성년후견인 지정 관련 두 번째 심리는 3월 9일에 열린다.
또한, 설 연휴에 인터뷰를 공개한 점은 가족을 중시하는 한국 정서에 기대 신동빈 회장을 압박하는 여론몰이로 해석된다. 설 명절 동안 신격호 총괄회장은 장남인 신동주 대표의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예년처럼 차례를 지내며 함께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리에 차남인 신동빈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 동영상을 통해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장남과 설에 아버지도 찾지 않는 차남의 대결 구도를 다시 한 번 강조한 셈이다. 특히 설이라는 특수한 시점에 공개해 아버지와 반목하고 있다는 신동빈 회장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다.
▶신격호 총괄회장, 종업원지주회 설득 차원?
신격호 총괄회장의 인터뷰 동영상 내용을 살펴보면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 그동안 신 총괄회장은 장남 신동주 대표가 롯데그룹의 후계자이고, 차남 신동빈 회장은 중국 사업 실패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등의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신동빈 회장을 향한 비난이나 공격은 없고, 창업주로서 롯데그룹의 과거와 경영철학 등을 밝히고 있다. 그것도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차분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동영상 후반부의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품과 판매망 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인 직원도 중요하지 않은가?'란 질문과 답변이다.
이 질문에 신 총괄회장은 "직원이 롯데를 운영, 경영하기 때문에 롯데의 직원은 열심히, 진중하게 일을 하게 한다. 직원을 소중히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음대로 해고하지 않는다. 일단 입사하면 해고한 적이 없다. 전후시대에 회사가 잘 되다가도 망해서 직원이 몇백명씩 해고됐다. 그런 걸 보면서 직원들이 곤란하겠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직원을 소중히 생각했다. 그래서 무리해서 채용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만을 뽑았다. 해고하는 일은 힘든 일이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직원을 중요하게 대했다"라고 직원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동안 신격호 총괄회장이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오너 일가와 일본 내 최고경영자(CEO)들을 언급했을 뿐, 정작 롯데그룹 직원들을 상대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 두고 신 총괄회장이 본격적으로 일본 롯데홀딩스의 종업원지주회를 포섭하기 위해 나선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일본의 종업원지주회는 한·일 롯데그룹의 핵심인 롯데홀딩스의 지분 27.8%를 소유하고 있다. 신동주 대표가 롯데홀딩스 지분 28.1%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 광윤사를 장악했지만, 여전히 지분 싸움에서 신동빈 회장에게 뒤지고 있다. 그런데 종업원지주회가 만약 신동주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면 롯데홀딩스 지분 과반을 넘어서면서 바로 대반전이 일어날 수 있다. 롯데홀딩스를 장악한 사람이 한·일 롯데그룹을 모두 품에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 대표는 일본에서 종업원지주회 설득을 위해 노력을 해왔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창업주가 롯데그룹의 창업 과정과 직원들에 대한 생각을 직접 밝히면서 판세 뒤집기에 마지막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박종권 기자 jkp@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