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 이후 역사를 써나간 숱한 스타들 가운데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표적인 세대는 1973년생들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프로야구가 시작됐으니 '베이스볼 키드'로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들이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시절 아마추어 유망주들은 프로행보다 대학 진학을 선호했다. 92학번을 달게 된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 각종 국제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프로 입단 후에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을 함께 했다.
박찬호를 비롯해 임선동 조성민 박재홍 등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박찬호는 한양대 2학년때 LA 다저스에 스카우트돼 코리안 메이저리거의 시작을 알렸다. 1994년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역대 17번째 선수로 각광받기도 했던 박찬호는 160㎞에 이르는 강속구를 앞세워 '코리안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을 얻으며 미국 대륙을 누볐다. 2001년말에는 5년간 6500만달러, 당시로선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액수로 FA 계약을 맺으며 텍사스 레인저스로 옮겨 화제가 됐다. 아시아 출신 최다인 124승 기록은 전설로 남아 있다.
임선동과 조성민은 아마추어 시절 최고 투수 자리를 주고받으며 경쟁을 벌였다. 임선동은 연세대 졸업 당시 이중계약 문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1997년 LG 트윈스에 입단해 11승을 올리며 프로 무대서도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1999년 현대 유니콘스로 옮겨서는 정민태 김수경 등과 함께 선발 왕국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2002년 8승을 올린 이후부터는 부상 등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다 2006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조성민은 고려대 4학년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화제를 뿌렸다. 2년간의 성장기를 거쳐 1998년 요미우리 선발진에 합류해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했지만, 그해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부상을 입으면서 순탄치 않은 선수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아마추어 시절의 조성민은 150㎞를 웃도는 빠른 공과 수려한 외모로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었다.
대표팀 시절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며 '리틀 쿠바'란 별명을 얻은 박재홍은 1996년 프로에 들어와 사상 첫 30(홈런)-30(도루)를 달성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통산 316홈런을 때리며 200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의 간판타자로 이름을 떨쳤다. 박재홍의 천부적인 타격 자질은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3년생과 더불어 1982년생도 '황금 세대'로 불린다. 이대호 김태균 오승환 추신수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프로야구는 선동열, 이종범의 시대였다. 그리고 중고교를 시절 TV로 중계된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는 그들을 더욱 야구에 빠져들도록 했다. 이대호는 롯데 자이언츠에서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두 차례 달성하며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섰고, 2012년 일본에 진출해서도 최정상급 타자로 활약을 이어갔다. 지금은 더높은 꿈을 위해 메이저리그 입성을 추진하고 있다. 김태균은 2001년 입단 후 한화 이글스의 간판타자로 성장하며 통산 3할2푼의 타율을 기록중이다. 2010~2011년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에 진출했다가 3년만에 돌아온 뒤에도 강력한 타격 포스를 뽐내고 있다. 그는 올해 600여명에 이르는 프로야구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16억원의 연봉을 받는다.
오승환은 삼성 라이온즈서 최고의 마무리로 이름을 높인 뒤 2014년 일본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해 2시즌 동안 80세이브를 올리며 열도 또한 정복했다. 올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한 오승환은 불법 원정도박으로 잃은 이미지 회복을 위해 심기일전 하겠다고 밝혔다. 추신수는 2001년 미국으로 날아가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성장해 7년간 1억3000만달러의 FA 잿팟을 터뜨려 이젠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타자가 됐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