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세 번째 백지 위임이었다. 두산 베어스 이현승(33)은 이번에도 협상 테이블에서 별 말이 없었다. "알아서 주세요." 한 마디가 전부였다. 결과는 4억원. 그는 일찌감치 연봉 계약을 마치고 개인 훈련에 돌입했다.
이현승은 지난해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먼저 경험한 건 지옥이었다. 캠프에서 5선발로 낙점돼 3월20일 시범 경기를 치르다가 왼 중지가 미세 골절됐다. 1회초 KIA 2번 강한울이 친 타구에 예기치 못한 부상을 당했다. 다시 마운드에 서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개월. 6월7일에야 2군 복귀전을 치렀다. 당시 이천 베어스파크에서 만난 그는 "몸 상태는 좋다. 정말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라고 했다.
간절함이 통했다. 복귀전을 치르고서 이틀 뒤 1군 엔트리에 등록됐다. 오랜만에 밟은 잠실 땅. 그 곳은 천국이었다. 실전 감각이 떨어졌다는 우려에도 쌩쌩한 공을 뿌렸다. 140㎞ 초반대에 머물던 직구가 140㎞ 중후반대로 살아났다. 시즌초부터 뒷문 고민이 많았던 김태형 감독. 주저 없이 그를 마무리로 승격했다. "배짱이 좋은 투수다. 현대 시절부터 어떻게 공을 던져야 하는지 아는 선수"라고 했다.
생애 첫 마무리 임무를 맡은 그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41경기에서 3승1패18세이브. 평균자책점은 2.89였다. 몸쪽 직구가 주무기였다. 또 같은 곳에 슬라이더를 꽂아 넣었다. 두산 전력분석팀은 "팀 내에서 몸쪽 승부를 가장 잘 하는 투수다. 슬라이더는 커터와 비슷한 움직임"이라고 했다.
이 같은 활약에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협상에 임했다. 내년이면 FA 자격을 얻어 프리미엄 효과도 있었다. 그리고 선택한 백지 위임. 구단은 지난해 1억5500만원에서 158%오른 4억원을 안겼다. 팀 내 최고 인상률이었다.
사실 이현승의 백지 위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히어로즈에서 트레이드 된 이후 첫 두 시즌 동안에도 "알아서 달라"고 말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미안함 때문에 구단에게 선택권을 준 것. 지금과는 정반대다.
그는 두산 첫 시즌이었던 2010년 46경기에 등판해 3승6패4홀드 4.75의 평균자책점을 올렸다. 이듬해에는 50경기에서 3승5패6홀드 4.82의 평균자책점을 찍었다. 당시 구단은 최소 두 자릿수 승수를 기대하고 금민철에 현금을 얹어주는 조건에 이현승을 영입했지만, 부상 여파로 자기 공을 던지지 못했다. 이현승도 "내가 두산와서 보여준 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 마침내 이름값을 했다. 2010년부터 줄곧 1억원 대를 유지하던 연봉도 4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김태형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이현승이 마무리로 정착하면서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했고, 구단도 이를 인정했다. 다만 아직까지 그는 자신이 붙박이 마무리 투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야구란 게 그렇다. 올 시즌 내가 못하면 금방 다른 선수가 마무리를 맡는다. '이현승 자리'란 게 존재할 수 없다"면서 "프리미어12 대회에 출전하면서 많이 던진 것도 사실이지만, 비시즌 동안 푹 쉬면서 몸 관리를 했다. (정)재훈이 형과 함께 후배들을 잘 이끌어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함태수 기자 hamts7@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