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열정만 믿고 살기엔 현실은 녹록치 않다. 열정의 순수함은 이용당하기 쉬워서 도리어 철없음으로 폄훼되곤 한다. '열정페이'가 화두가 된 시대,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는 시쳇말로 "열정따윈 개나 줘버려"라고 시원스럽게 일갈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신문사 연예부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의 직장 생활 분투기를 그린 작품이다. 사회인으로 내딛는 첫 걸음의 설렘은 성질 고약한 상사 하재관(정재영) 부장을 만나면서 산산조각 나버리고, 날마다 사표 쓰는 꿈을 꾸는 짠내 나는 일상이 펼쳐진다. 진짜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현실적인 이야기에 관객들의 공감이 이어진다.
영화는 도라희의 성장담이 중심이지만 이야기의 동력은 정재영이 연기한 하재관으로부터 나온다. 특종을 잡아오라고 닦달하고 수시로 화내고 성질 부리는 하재관은 어딘가에 존재할 법해서 더 만나고 싶지 않은 상사다. 그런데도 왠지 그가 싫지 않은데, 그건 아마도 뜨거웠던 시절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건너온 사람의 피로감이 얼굴 한 켠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하재관을 연기한 사람이 정재영이기 때문에 진심과 인간미가 보태져 이해받을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굳이 선악을 나누자면 악에 가까운 인물인데 악랄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정재영은 "시도때도 없이 화내는 모습을 계속 보니까 관객들이 익숙해진 것 같다"고 설명하며 껄껄 웃었다. "하재관은 겉모습은 못되지만, 악의는 없는 인물이에요. 도라희를 무섭게 몰아붙여도 결국엔 존중하고 도와주잖아요. 나름의 신념과 열정을 갖고 있죠. 악역이지만 빈틈이 있어서 정감 있게 봐주시는 것 같기도 해요."
영화를 촬영하면서 정재영은 때때로 신인 시절을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처음이란 말에서 불안함도 느끼지만 기대감도 품게 되잖아요. 새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설렘을 느끼듯이 처음 연기하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품고 있을 열정을 떠올리게 돼요. 젊다는 것도 부럽고요. 그 시절이 그립게 느껴져요."
어쩌면 영화 속 하재관도 사회 초년생 시절엔 도라희만큼 열정과 정의감 넘치는 기자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재관의 신입 시절을 상상하다가, 문득 하재관을 연기한 정재영의 신인 시절이 궁금했다.
정재영이 가장 열정으로 충만했던 시기는 20대였다. 자유로운 직업을 갖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선택한 서울예대 연극과. 그런데 뜻밖에도 적성이 맞았다. "이렇게 재밌는 일은 처음 만났어요. 무언가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좋아하게 된 것도 처음이었고요. 연극에 미쳐있던 시절이죠. 밤새는 줄 모르고 작업만 했어요. 원래 말수도 적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는데 연기를 하면서 성격이 변했어요. 배우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마음이 열리더군요. 넉살도 좋아졌어요."
연극쟁이 정재영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연극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해소가 안 되는 연기적 갈증을 느끼면서부터다. 군제대 이후 영화과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영화 작업에도 참여했다. 연극과는 다른 사실적인 연기에 매료됐다. "연기는 어떠한 형태로든 진짜처럼 보이는 걸 목표로 하죠. 영화는 연극에 비해 매체 성격상 훨씬 리얼리티가 있잖아요. SF 영화라 해도 배우 실제 그 상황에 놓인 것처럼 리얼리티를 갖고 접근해야 해요. 그래야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기술도 점점 리얼리티를 목표로 발전해가잖아요. 배우들에게도 연기의 리얼리티는 계속 고민해야 할 숙제이죠."
열정으로 뜨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던 정재영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열정을 하얗게 불태워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그 짓을 또 하라고?"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땐 너무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여유가 없었죠. 즐기지도 못했고요.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덜' 열심히 할 겁니다. 좀 놀아야죠.(웃음)"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