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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팩트 있는 '단역(短役)'에 스타배우가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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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는 2013년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으로 출연했다. 시나리오 상 분량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완성되자 반향은 컸다. 첫 등장 장면에서의 그 어마무시한 카리스마란….

결국 이정재는 이 영화로 그 해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탔다. 이후 CF계에서 상종가를 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40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배우 인생에 변곡점이 된 작품이었다. 비단 이정재 개인에게만 의미 있었던 작품이 아니었다. 배역에 대한 스타 배우들의 인식이 바뀌는 과정에 있어 주마가편이 됐다. 비중 보다는 캐릭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강화. 잘 잡은 조연 열 주연 안 부럽다고 해야할까. 이런 케이스는 영화와 드라마에 걸쳐 결코 적지 않다. 영화계에서는 '관상' 이전에도 이미 최동훈 감독의 2012년작 '도둑들'에서 김윤석 김혜수 이정재 전지현 임달화 김해숙 김수현 등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꿈의 캐스팅을 완성한 경우가 적지 않다. 감독에 대한 믿음, 정확하게는 감독이 그려내는 캐릭터에 대한 믿음이 낳은 결과다. 배우 입장에서는 전체적으로 작품 보는 눈이 넓어졌다. 비중과 관계 없이 충분히 빛날 수 있는 숨은 조연이 없나 눈을 크게 뜨고 시나리오와 시놉시스를 꼼꼼하게 살피게 됐다. 작품을 분석하는 매니지먼트 업계의 작은 변화다.

임팩트 있는 단역(短役)에 스타 배우가 몰리고 있다. 흔히 엑스트라란 말과 혼용해 쓰는 단역(端役)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짧은 역할, 즉, 극 중간에 잠시 나왔다 사라지거나 극 전체 비중이 주연배우 만큼 꽉 차 있지 않더라도 임팩트 있는 역할에 스타들이 출연을 자청하고 있다. 과거엔 상상하기 힘들었던 풍경. 이러다 보니 한 작품에 스타들이 몰리는 '꿈의 캐스팅'이 빈번하게 이뤄진다. 예전에 내가 작품 속 1순위인가 2순위인가를 놓고(심지어 남녀 주인공 간 자존심 싸움도 만만치 않았다)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다면 지금 양상은 다르다. 그저 내 역할이 작품 전체에서 길든 짧든 얼마만큼 강렬한 임팩트가 있는 역할인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설령 원톱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박지은 작가의 '프로듀사'에는 차태현, 공효진, 아이유, 김수현 등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다. '화정'에는 차승원, 이연희, 서강준, 한주완, 이성민, 박영규, 김창완, 김재원, 신은정, 정웅인, 김여진 등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호흡이 긴 사극 답게 화려한 출연진은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정도전'에서 강렬한 연기로 사극 러브콜 1순위 배우로 올라선 박영규는 선조 역을 맡아 1, 2회에서 역할을 다한 뒤 퇴장한다. 여느 드라마였다면 '특별출연' 정도로 언급됐을 분량. 하지만 상종가 박영규는 선뜻 선조 역을 맡았다. 캐릭터가 확실한 만큼 손해볼 게 없는 출연이란 판단. 인조 역의 김재원은 광해를 폐위시키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인조반정과 함께 역할이 커진다. 차승원과 극의 전·후반부를 각각 나눠서 이끌어가게 된 셈.

기존 드라마에 중도 합류하는 스타도 있다. 화제의 드라마 '징비록'에 이순신 역할로 출연키로 한 김석훈이 대표적. '명량' 같은 영화와 달리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주로 다루는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중앙정치가 중심이다. 그만큼 이순신은 이름값은 있지만 그 비중이 크지는 않다. 수많은 작품에서 주연배우로 활약하던 김석훈의 이름값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적을 분량. 하지만 김석훈은 비중보다 캐릭터를 택했다. 그리고 정통사극에 일가견이 있는 KBS와 작가, PD에 대한 믿음도 한 몫했다. 오랜만의 드라마 복귀작이라 신중했던 그에게 짧지만 이순신만큼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역할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터. 김석훈 처럼 비중보다 캐릭터를 중시하는 스타들의 선택기준 변화 속에 '꿈의 캐스팅'은 점차 늘어가고 있다. 바꿔 말하면 작품 간 캐스팅에 있어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심해질 공산이 큰 방송·영화계의 흐름 변화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