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성균은 영화 '살인의뢰'를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웠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작품을 책임진 배우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 아빠로서 영화 속 극한의 상황이 마치 실제인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화 속 캐릭터와 실제 삶을 구분짓는 일이 연기 베테랑인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스크린을 통해 다시 그 시간을 되돌아 보는 일도 힘겹긴 마찬가지다.
'살인의뢰'를 보고 나면 김성균의 이런 감정을 누구나 이해할 것이다. 김성균은 이 영화에서 연쇄 살인마에게 아내를 잃은 남자 승현을 연기한다. 아내의 시신은 찾지도 못한 채 뒤늦게 아내가 전해주려던 임신 소식을 접한 승현의 얼굴에 격하게 일렁이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처절한 울부짖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고통을 김성균의 연기를 통해 간접 경험하는 것도 관객들에겐 상당히 힘겨운 일이다.
"살인범이 법적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피해자들의 고통이 사라질까요? 그가 죽는다고 해도 결코 홀가분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랬어요. 영화를 찍으면서도 힘들었고,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마음이 아팠어요."
영화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곤히 잠든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불안해지곤 했다. "비록 연기이지만 제가 촬영을 통해 경험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사랑하는 가족을 어느 날 갑자기 잃게 되면 어쩌나. 상상만 해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더군요."
무려 10명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마는 피해 유가족을 향해 비열한 웃음을 흘린다. 사형을 선고 받고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감옥이 그 살인마에겐 세상의 증오로부터 몸을 숨기는 도피처가 되기 때문이다. 법은 살인마를 보호하지만, 피해 유가족은 방치한다. 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가. 승현의 '사적 복수'를 통해 이 영화는 우리 사회 법 체계와 사형 제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피해자 역할을 연기해 보니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느껴져요. 용서가 최고의 미덕이라도 되는 양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것도 문제 아닌가 싶어요. 직접 겪어본다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없을 겁니다. 최소한 우리 영화에서만큼은 그 살인범을 용서해선 안 된다고 봐요."
영화도 이러한데 현실은 얼마나 더 비극적일까. 김성균은 영화 촬영에 앞서 찾아본 다큐멘터리를 예로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사건에 대해 찾아봤어요. 범인은 잡지도 못했는데 공소시효가 끝나가고 있잖아요. 피해자들이 제발 공소시효를 연장해달라고 법원에 사정하고 매달려야 하는 현실이 정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습니다."
누구보다 영화 속 승현의 절규를 깊이 공감하는 김성균이지만 사실 그에게 이 영화는 상당한 도전이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이웃사람', '화이' 등에서 선보인 강렬한 악역과는 정반대 캐릭터. 감정 연기가 중요하다 보니 고민이 많았다. "어느 정도 캐릭터의 감정 흐름을 설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아내가 살해된 상황을 매끄럽고 노련한 연기로 표현하는 게 도저히 안 되더군요. 그냥 제가 느끼는 대로 본능으로 연기했어요. 촬영 전에 살인마를 연기한 박성웅 선배의 출연 장면을 모니터 하면, 분노의 감정이 확 올라와요.(웃음) 박성웅 선배의 인간적인 매력에 흔들릴까봐 일부러 선배와 거리를 조금 두기도 했죠.(웃음)"
김성균은 이 영화를 통해 악역 이미지에서 한발 벗어났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시청자들이 사랑한 '응답하라 1994'의 삼천포 역시 이젠 놓아줄 때가 된 듯하다. 이 두 가지 이미지로만 각인되기엔 김성균은 너무나 아까운 배우다. "사람들의 뜨거웠던 관심도 1~2개월이면 사라진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반짝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여유를 갖게 됐죠. 지금은 너무나 편안해요. 오로지 작품만 생각하면 되잖아요."
여섯 살과 네 살, 두 아이의 아빠. 그리고 8월에는 셋째가 태어난다. 세 아이의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다는 김성균. 아이들이 자라면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물으니 '범죄와의 전쟁'을 꼽는다. "연극만 하다가 처음 출연한 영화이기도 하고 추억이 많아요. 아이를 안고 이 영화 시나리오를 받으러 갔었죠." 첫 아이가 스무살이 되려면 14년이나 남았는데 그 사이 김성균의 대표작은 얼마나 더 많아질까. 그러기 위해 그는 또 한번 다짐했다. "앞으로도 한눈 안 팔고 작품에만 충실하려 합니다."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