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로 패색이 짙던 후반 46분, 기성용(스완지시티)의 패스를 받은 손흥민(레버쿠젠)이 왼발 슈팅으로 굳게 잠겼던 호주의 골문을 열었다. 2015년 호주아시안컵의 승부는 극적으로 연장으로 접어들었다. 한국은 아쉽게 1대2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나 손흥민의 동점골 장면은 호주아시안컵에서 한국 축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2000년대에 이어 201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를 관통했던 '양박쌍용(박지성+박주영+기성용+이청용)' 시대가 막을 내리고, 손흥민과 기성용이 한국 축구의 기둥으로 자리매김한 '흥용시대'의 탄생이었다.
슈틸리케호의 호주아시안컵은 기성용과 손흥민에 의해 울고 웃었다. 반전의 연속이었다. 손흥민은 조별리그에서 '악몽'을 경험했다. 오만과의 조별리그A조 1차전에서 경기 초반 크로스바를 강타하는 슈팅을 날리는 등 반짝 활약했지만, 이후 부진의 연속이었다. 쿠웨이트와의 2차전에는 감기 몸살로 결장했다. 공격의 핵인 손흥민이 전력에서 제외되자 슈틸리케호는 최악의 졸전을 펼치며 실망감을 안겨줬다. 호주와의 3차전,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몸살로 근육이 굳어지면서, 특유의 폭발적인 돌파가 상대 수비에 저지당했다. 슈팅의 날카로움마저 떨어졌다. 8강전부터 반전이 시작됐다. 손흥민이 날개를 펴자, 슈틸리케호가 높이 날았다.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서 잇따라 슈팅을 쏟아낸 손흥민은 홀로 2골을 넣으며 4강행을 견인했다. 이라크전에서 비로소 정상 컨디션을 되찾았다. 결승전까지 3골을 뽑아낸 손흥민은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공격수로 성장했다.
'중원의 핵' 기성용은 믿음직한 '캡틴'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장 완장이 그의 축구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메이저대회에서 첫 주장의 임무를 소화하게 된 기성용은 경기력과 리더십 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사냥했다. '캡틴 기(Ki)'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아시안컵 출전 이전부터 소속팀 스완지시티에서 살인일정을 소화한 기성용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주장 완장이 가져다 준 책임감에 쉴수가 없었다. 기성용은 아시안컵 전경기에 출전했다. 그에게 아시아 무대는 좁았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서 한국의 공수를 조율했다. 그의 패스는 거리, 방향 모두 환상적이었다. 대지를 가르는 환상적인 롱패스로 여러차례 공격의 활로를 찾았다. 노련한 키핑력도 과시했다. 기성용은 408개의 패스를 뿌려내며 패스 횟수에서 아시안컵 전체 1위에 올랐다. 패스 성공률은 93.1%, 클래스가 달랐다. 조별리그 도중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낙마한 '절친' 이청용(볼턴)과 구자철의 공백 속에 '캡틴' 기성용의 존재감과 책임감은 더욱 커졌다. 슈틸리케 감독은 고비마다 '기성용 시프트'를 활용해, 경기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기성용은 구자철 대신 섀도 공격수로, 이청용 대신 왼쪽 측면 날개로 활약하며 공격에 힘을 보탰다. '3단 변신'이 가능한 기성용의 능력은 한국 축구에 선물이었다. 그의 리더십도 성공적으로 평가 받았다. 의견을 물을 때는 '맏형' 차두리(서울)과 곽태휘(알 힐랄)에게 조언을 구했다. 큰 대회 경험이 적은 후배들에게는 든든한 '형'이 됐다. 기성용은 "처음 주장을 맡았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라운드 안에서 A매치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기댈 수 있는 주장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때문에 누구보다 좋은 경기력을 보여줘야 했다"며 '솔선수범' 리더십을 보였다. 혈기가 왕성했던 20대 초중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파문을 일으켜 그에게 등을 졌던 팬들마저 성숙한 리더로 거듭난 기성용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본격 개막된 '흥용시대'의 첫 대회는 아픔이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의 쓴맛을 봤다. 그러나 팀의 리더로 변신한 기성용과 '에이스'의 존재감을 뽐낸 손흥민이 이끄는 한국 축구는 아시안컵 준우승으로 새 희망을 발견했다. 손흥민은 결승전을 마친 뒤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우리는 아직 부족하고 배워야 할 게 많다. 우리는 어린 선수들이다. 경험을 쌓아 다음 대회를 잘 준비해야 한다." 눈물과 함께 미래를 약속했다. 기성용은 또 한번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마음가짐과 태도가 모두 바뀌었다. 부상으로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 몫까지 해야 하는 부담감이 커진 상황에서 모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줬다. 이들의 노력으로 팀이 힘을 받았다." 새 시대에 희망이 가득하다. 부상에서 돌아 올 이청용과 구자철이 대표팀에 힘을 보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생들과 1990년대 초반생들이 하모니를 이루는 '젊고 경험 많은 세대'가 한국 축구의 기둥이고, 새 희망의 빛이다.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