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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亞컵]이정협 병풍 자처한 슈틸리케, 2012년 홍명보-박주영 '오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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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8일(이하 한국시각), 슈틸리케호가 베이스캠프인 호주 시드니에 입성한 날이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61)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정협(24·상주)을 방으로 불렀다. 이정협은 영문도 모른 채 면담을 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입에선 깜짝 놀랄 만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네가 잘하든 못하든 내가 책임을 질테니 걱정말고 편하게 부담없이 뛰어라."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에게 병풍을 자처했다. 자신이 발탁한 선수가 혹시라도 비난을 받더라도 끝까지 감싸 안겠다는 의미였다.

이번 아시안컵을 앞두고 이정협의 발탁에 의문을 품었던 이들이 많았다. 이정협은 철저한 '무명'이었다. 지난 시즌 K리그 클래식에서 4골(25경기)에 그쳤다. 상주에서도 선발 출전이 2경기 뿐이었다. A매치 경험은 전무했다. 당시 이동국(36·전북)과 김신욱(27·울산)이 재활 중이었다. 대표팀 합류가 어려웠다. 슈틸리케 감독에겐 정통파 타깃형 스트라이커를 필요했다. 하지만 이정협의 선택은 도박에 가깝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부진 이후 조금씩 부활의 모습을 보이던 박주영(30·알샤밥) 카드도 과감하게 포기하고 이정협을 대표팀 명단에 올렸다. 여론은 좋지 않았다. 최종명단 발표 이후 호주로 떠나기 전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의 모험 때문에 이정협이 상처 받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이정협을 부른 것이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도왔다. 훈련중에 실수를 해도 다그치지 않았다. 옆집 아저씨처럼 편안하게 대해줬다.

면담 이후 29일이 흘렀다. 이정협은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27년 만의 아시안컵 결승 진출을 이끈 뒤 그제서야 슈틸리케 감독과의 면담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이젠 더 이상 '무명'이 아니었다. 이정협은 "주변에선 모험이라고 했지만 나를 좋게 봐주셨다. 감독님의 그런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윤성효(부산) 박항서(상주) 감독님처럼 슈틸리케 감독님은 평생의 은인"이라며 웃었다.

슈틸리케 감독과 이정협의 상황은 3년 전과 비슷하다. 당시 런던올림픽대표팀을 이끌던 홍명보 전 감독과 박주영이 도마 위에 올랐다. 홍 전 감독은 병역 연기 논란에 휩싸였던 박주영의 병풍이 됐다. "박주영이 군대에 안간다면 내가 대신 가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박주영의 병역 연기 해명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냈다. 홍 전 감독은 "팀과 선수를 위한 감독이 되고자 하는 게 내 철학이다. 선수가 경기장 안팎에서 겪는 어려움을 함께 할 자세가 되어 있다. 축구 선배와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짊어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섰다"고 밝혔다. 어디까지나 런던올림픽에 나서는 '팀'을 위한 결정이었다. 논란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러나 홍 전 감독은 '마이웨이'를 외쳤다. 박주영을 와일드카드(23세 초과 선수)로 발탁했다. 홍 전 감독의 믿음에 선수는 기량으로 보답했다. 박주영은 홍명보호가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 신화를 일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최고참의 역할을 수행했다. 젊은 선수들에겐 정신적 지주였다.

확고한 신념과 책임감이 바탕이 된 감독의 도박은 부진에 빠진 선수, 무명 선수를 춤추게 했다.

시드니(호주)=김진회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