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학성고 3학년 시절 어른들의 싸움에 휘말렸다. 향후 한국 축구를 책임질 한 선수의 미래를 두고 감독과 부모의 의견이 엇갈렸다. 결단을 내렸다. 고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자퇴서를 썼다. 결국 고래 싸움의 희생양이 됐다.
학교에서 나온 뒤 마냥 놀 수 없었다.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때마침 러브콜이 왔다. 그 동안 17세 이하부터 연령별대표팀을 거친 덕에 요코하마FC에서 영입을 제안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연습 경기를 뛰었다. 빨랐다. 남다른 축구센스를 보였다. 이 어린 선수는 단숨에 요코하마FC 감독의 눈을 사로잡았다. 주인공은 바로 '슈틸리케호 원톱' 조영철(26·카타르SC)이었다.
'미완의 대기'였다. 조영철은 '홍명보의 아이들'이었다. 2009년 20세 이하 월드컵부터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은 허벅지 부상으로 낙마했다. 조영철은 조광래 전 A대표팀 감독의 눈도 사로잡았던 선수였다. 2010년 8월 11일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당시 조영철의 나이는 19세에 불과했다.
눈에 띄는 점은 항상 바뀐 A대표팀 감독들이 조영철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가진 게 많다는 얘기다. 문제는 대표팀에 뽑힌 뒤였다.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우측 윙어에는 부동의 이청용(27·볼턴)이 버티고 있었다. 2013년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조영철은 홍명보의 아이들로 불리는 어린 선수 중 가장 발전을 해온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한 살 많은 이청용의 벽을 넘기엔 힘들었다. '만년 유망주'란 꼬리표를 떼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드디어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가 됐다. 지난해 10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을 만나면서다.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의 A대표팀 사령탑 데뷔 무대였던 파라과이와의 평가전에 조영철을 원톱으로 세우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조영철에게도 도전이었다. 대표팀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나선 적이 없었다. 소속팀에선 간간이 원톱으로 출전했다.
또 다시 어둠의 그림자가 몰려왔다. 원톱 자원에는 K리그 간판 타깃형 스트라이커 이동국(36·전북)과 김신욱(27·울산)이 버티고 있었다. 하늘이 도왔다. 2015년 호주아시안컵을 앞두고 두 명이 모두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조영철도 호주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조영철을 원톱 자원에 포진시켰다.
비난의 목소리도 높았다. 조영철, 이근호(30·엘 자이시), 이정협(24·상주) 등이 포함된 공격진은 역대 최약체로 평가됐다. 부담이었다. 비난 여론을 돌려놓아야 했다. 공격수에게는 결국 골이 답이었다. 그러나 골 소식은 없었다. 지난 4일(이하 한국시각) 아시안컵 최종 리허설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에서도 출전 기회를 얻으며 슈틸리케 감독의 믿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골을 넣지는 못했다.
조영철은 10일 오만과의 대회 조별리그 1차전 출전 통보를 9일 받았다. 일단 기쁨은 삼켰다. "타깃형 골잡이가 없으니 많이 움직이면서 상대 수비를 괴롭히고 공간을 노려라"던 슈틸리케 감독의 주문만 생각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조영철은 조용하게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전반 인저리타임에 구자철의 중거리 슛이 날렸다. 달려들던 조영철은 골키퍼 손에 맞고 나온 볼을 재빠르게 슬라이딩 슛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A매치 데뷔골이었다. 조영철은 슈틸리케 감독에게 메이저대회 첫 승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조영철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는 "첫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서 자신감이 살아났다"고 밝혔다. '룸메이트' 구자철(마인츠)의 도움도 컸다. 조영철은 "자철 형과 방을 같이 쓴다. 이야기도 많이 한다. 서로 평소에 뛰는 것처럼 즐기자고 했다. 자철이 형이 밝은 성격이다.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고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 새 목표가 생겼다. "매 경기 골을 넣고 싶다"는 조영철이다. 그러면서도 "득점왕 욕심은 없다"며 웃었다. 앳된 조영철의 미소는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였다.
캔버라(호주)=김진회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