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이게 우리의 현주소가 아닐까요?"
남의 일 이야기하듯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 22일 K-리그 클래식 37라운드 상주전, '전남 레전드 수문장' 김병지는 만44세7개월14일의 나이에 골문 앞에 섰다. 자신의 678번째 경기에서 팀의 3대 1 승리를 지켜냈다. 신의손(현 부산 골키퍼 코치)의 만44세7개월9일 기록을 넘어, K-리그의 대기록을 다시 썼던 이날을 그라운드 위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저만 알고 넘어간 거죠. 허허." 역대 최고령 출전, '철인' 김병지는 한국 축구사에 남을 또 하나의 기록을 아내와 단둘이 조용히 자축했다.
'레전드' 김병지는 "가족도 안챙기는 생일을 누가 챙겨주겠나. 그날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가족도 안보는데 관객이 봐주길 바라는 건 아이러니 아니냐고"라며 씁쓸히 웃었다. "내 기록이 중요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K-리그의 큰그림과 미래를 바라봤다. "기록을 마케팅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 야구는 우리보다 기록을 훨씬 잘 챙긴다. 스포츠 마케팅에서 우리보다 확실히 앞서 있다. 축구도 우리끼리 더 잘 챙겨야 바로 선다. 4~5주 전부터 분위기도 띄우고… 열심히 노출하고, 마케팅해야 스스로의 가치도 올라가고, 자연스럽게 스폰서도 붙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992년 울산현대에서 데뷔를 한 이래 지난 23년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K-리그 그라운드에서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헌신해온, 소나무같은 이 선수를 우리는 '레전드'라 칭한다. 세월을 거스르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이 남자의 롱런 비결은 한결같은 일상의 꾸준함이다. "특별한 게 없는 게 특별한 것"이라고 했다. 알려진 대로 23년째 78㎏의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일어나서 밥먹고 쉬고 운동하고 경기준비하고 경기 뛰고 회복 훈련하는 일상을 23년째 면면히 이어왔다. 뱀탕, 개구리탕 같은 보양식과도 거리가 멀다. "그냥 정해진 범위내에서 먹고 움직이고 운동하고 관리하고…, 그게 다다. 꾸준함이 승부를 가르는 것같다. 집밥 잘 먹고…, 내겐 가족이 힘이고 보약"이라며 웃었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걷는 '태백, 산, 태산' 세 아들은 또 하나의 동기부여다. "처음부터 기록을 염두에 두고 온 길은 아니었다. 방향타는 됐겠지만 하루하루 쌓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다. 나는 의사도 과학자도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세월을 거스르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 깨달았고. 철학처럼 인생을 살게 됐다"고 말했다. 올시즌에도 김병지는 37라운드까지 풀타임을 뛰며, 전남의 최후방을 굳건히 지켰다. 신바람 공격축구를 추구하는 하석주 전남 감독의 전술에 맞춰 '스키퍼(스위퍼+골키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짓지 않았다. "목표치는 있지만 한계치는 없다"고 말했다. "내가 해보니 그렇더라. 저기가 목표인데 하고 거기까지 가면, 또 목표가 생기고, 또 도전하고, 또 한계를 넘고…." 현재 목표는 700경기다. 600경기의 위업을 달성하는 순간 700경기를 결심했다. "700경기가 한계치는 아니니까, 넘고 나면 또 목표를 설정해야겠죠."
23년의 세월동안 위로는 10년, 아래로는 25년 수없이 많은 선후배 선수들과 그라운드에서 몸으로 부딪쳤다. 수없이 많은 스타가 뜨고 지는 현장을 또렷히 목도한 K-리그의 산 증인이다. "위로는 최강희 감독님, 아래로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살 후배까지 수천명의 선수와 함께 뛰었다"고 했다. 후배들에게 강인한 프로 의식을 강조했다. "요즘 어린 선수들은 '즐긴다'는 말을 자주 한다. 즐기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딨나.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경기에선 전투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즐기면서 전투하기는 힘들다. 프로의 무대에서 즐기는 것은 승리자의 몫이다. 열번중 아홉번 이기는 프로선수는 즐길 수 있다. 열번 중 아홉번을 지면서 즐길 수 있나. 경기장에 오시는 팬들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절대 한순간도 설렁설렁해서는 안된다. 감동을 주는 '전투'를 해야 한다. '엔조이(enjoy)'는 올스타전같은 이벤트 경기에서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 "프로페셔널이라면. 단 한사람의 팬이 온다고 해도 동기부여는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것이다. 그걸 잊는 순간 도태되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지난 20년간 그런 선수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잘나가던 선수들이 동기부여를 망각하고 타성에 젖을 때 도태되는 건 한순간이다. 수많은 선수들이 소리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했다.
최고의 프로페셔널 후배를 꼽아달라는 말에 '자랑스런 후배' 최은성을 서슴없이 꼽았다. "한 클럽에서 그렇게 뛴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하다. K-리그 역사가 됐다"고 말했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쓴 선수들도 있다. 연습생으로 입단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포항의 신화용, 김광석도 최고의 프로다. 전주대 출신 전북 골키퍼 권순태는 나보다도 작았다. 최강희 감독이 '제2의 김병지'라고 하셨지만 나조차도 반신반의했다. 권순태를 보면 내 옛날생각이 난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했던 후배들이 보란듯이 성장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들 못지 않게, 힘든 곳에서 시작해 정상에 오른 후배들이야 말로 진정한 프로"라며 찬사를 보냈다.
골키퍼 레전드로서의 자부심도 빼놓지 않았다. "골키퍼는 외로운 자리다. 비난도 많이 받고 팀 패배에 대한 멍에를 기꺼이 져야 한다. 골을 막는 직업이자, 골을 먹는 직업, 골키퍼의 숙명이다. 그래도 자부심이라면 나로 인해 골키퍼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뀐 점"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제일 공 못차고, 뚱뚱한 애들이 골키퍼를 했다. 지금은 잘생기고 잘빠진 김용대, 이범영 같은 후배들도 있지 않나"라며 웃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최고령, 최다출전 기록은 매경기 진행형'이라는 말에 '병지삼촌'이 농담같은 진심을 던졌다. "'계속 기록'이니까 별로 안 중요한 것 같아요. 기록을 딱 세우고 끝나야 되는데, 계속 이어지니까 '저 사람은 당연하지' 생각하는 것같아."
성실한 조력자, 한결같은 '김병지 아내' 김수연씨가 이날 밤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프로 밥… 밥… 그 밥 먹은 지 어언 23년, 질린다는 소리 한번 없이 한눈 한번 팔지 않고 뛰다가, 걷다가, 뛰다가… 지치면 터벅터벅 어쨌든 간다. (중략) 무던히도 무던한 사람, 무던한 신랑이 얼마나 섭섭했으면 한소리 한다. 난 다 안다.말 안해도…. 기록은 단지 기록일 뿐… 썰렁한 한국축구! 나라도 울서방 토닥토닥 수고했다며… 등 두드려줘야겠다. 남편 최다 경기, 최고령 기록 경신을 가족끼리 자축하며.'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