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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AG]박태환 400m금메달때 쓰려했던 취재수첩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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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25·인천시청)이 인천아시안게임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딴다면, 쓰고 싶은 이야기가 구름처럼 많았다. '400m의 레전드가 돌아왔다' '시련을 이겨낸 가족의 힘' '스폰서 없이 이룬 3연패' '안방 부담감 이긴 또한번의 기적 레이스' '세월을 거스르는 괴력' 등등. 박태환은 23일 인천 문학박태환수영장에서 펼쳐진 자신의 주종목 자유형 400m 결선에서 동메달을 땄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순간, 박태환을 보고 싶다는 꿈 하나로 터키에서 인천까지 날아온 '자원봉사 소녀'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사실 우리에게 그의 메달색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그는 세계 최고이기 때문에."

경기 직후 국민들은 너도나도 검색창에 '박태환 잘했다'라는 검색어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팬들은 '수영영웅' 박태환을 '메달색'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24일 이어진 남자계영 400m에서 박태환은 다시 한번 힘을 냈다. 김성겸(국군체육부대) 양준혁(서울대) 남기웅(동아대) 등 후배들과 함께 출전해 3분18초44, 한국최고기록 동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안게임 개인 통산 메달은 총 18개(금6, 은3, 동9), 하나의 메달만 더 보태면 한국 선수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 기록을 가진 사격의 박병택(19개·금 5, 은 8, 동 6)과 타이기록을 세우게 된다.

'수영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세계적인 에이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온 유일한 청년, 지난 10년간 힘들거나 지칠 때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청년, 동메달의 아쉬움속에서도 1-2위 선수들에게 축하악수를 청할 줄 아는, '잘자란' 청년, 안방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해 미안하다고 연신 고개숙이는 청년에게 "괜찮다" "고맙다" "잘했다"는 인사를 건네고 있다. 금메달을 따면, 하려고 아껴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전을 보여주겠다"

스물다섯 박태환에게 올시즌은 유난히 힘들었다. 런던올림픽 직후 SK텔레콤과의 4년 후원 계약이 끝났다. 지난해 인터넷 인기강사 '삽자루' 우형철씨가 후원한 5억원과 국민들이 십시일반 모금한 7000여만원으로 호주전지훈련을 이어갔다. 인천아시안게임의 해, 모든 후원이 끊겼다. 국가적인 슬픔이 많았던 한해, 가라앉은 분위기속에 기업들은 지갑을 닫았다. 한국 최초의 수영 챔피언 박태환을 후원하겠다는 기업이 단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4년간 둥지 삼았던 마이클 볼 감독의 브리즈번 수영클럽에는 한국의 어린 후배선수들이 들어왔다. SK텔레콤에서 후원하는 꿈나무 선수들이었다. 그들에게도 선배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환경은 힘들어졌지만 기록은 오히려 좋아졌다. 2월 뉴사우스웨일스챔피언십에서 자유형 100m 한국최고기록을 썼고, 7월 김천대표선발전에서 자유형200m 시즌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했으며, 8월 팬퍼시픽수영선수권에선 자유형 400m 시즌 세계최고기록과 함께 3연패를 달성했다. 힘들수록 이를 악물었다. 인터뷰 때마다 "비전이 없다면 보여줘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진짜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어거지'로 버티게 된다. 내가 더 잘해야, 더 보여줘야 후원사도 생기고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다. 안정된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안정적으로 훈련을 이어갈 수 있도록…."

▶중국 취재진의 잠입과 쑨양의 도발광고

박태환은 9월초부터 인천 송도의 한 호텔을 오가며 박태환수영장에서 마무리 훈련을 시작했다. 전담팀은 인천에 여장을 풀면서부터 볼 감독의 지시에 따라 언론과의 접촉을 모두 끊었다. 쑨양을 자극하는 기사들이 한중 양국 언론을 통해 퍼져나갈 경우 경기 집중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봤다. 한국 미디어들은 선수 경기력 향상을 위한 조치로 받아들였다. 무언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갓 입국한 해외 언론들의 가장 큰 관심은 박태환이었다. 취재가 통제된 박태환수영장에 중국 언론이 몰래 잠입했다. 훈련중 카메라를 발견한 박태환은 깜짝 놀랐다. 얼마 후 '쑨양의 361' 도발광고가 공개됐다. '박선생 제기록에 도전해보시죠.' 코멘트는 박태환 전담팀에게도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박태환은 쿨했다. "기록이 더 좋은 건 틀린 말은 아니잖아"라며 웃었다. 박태환 전담팀은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박태환 역시 말이 아닌 실력으로 보여주길 원했다. 볼 감독에게 영어로 직접 말했다. "I'm going to show and then I will start to say.(일단 보여주고 나서 그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박태환의 힐링은 가족이었다

가장 외롭고 힘든 순간들을, 박태환은 굳건한 '가족의 힘'으로 버텨냈다. 온가족이 '박태환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이후 7년 넘게 박태환과 동고동락해온 매니저가 떠났다. 아버지 박인호씨가 경영하는 팀GMP에 '매형' 김대근 실장이 전격투입됐다. 호주 시드니에서 수영클럽을 운영했던 경험과 유창한 영어로 볼 감독과 박태환, 전담팀을 조율했다. 박태환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멘토' 누나 박인미씨가 마케팅실장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박태환수영장 인근 인천 송도에 사는 누나의 집은 '힐링' 아지트였다. 9월 숨막히는 조정훈련으로 지친 주말이면 누나집을 찾았다. 이제 "삼퉁 파이팅!"을 외칠 줄 알게 된 태희와 지난해 태어난 태은, 두 조카를 보며 시름을 잊었다. 초등학교때 유방암에 걸린 엄마가 활짝 웃는 모습이 좋아 늘 1등을 하고 싶었던 박태환에게 여전히 가족은 수영의 '이유'이자, '힐링'이다.

그래도 가장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박태환 자유형 400m 금메달! 3연패 위업 달성'였다. 금메달이 전부여서가 아니라. 런던올림픽 이후 지난 2년간 남몰래 흘려온 박태환의 땀과 눈물, 노력과 열정이 금메달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프리스타일 히어로' 박태환의 '아직 끝나지 않은 레이스'를 응원한다. 인천=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