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를 지나고 황혼기를 맞은 이현일(MG새마을금고). 그는 2년 전 런던올림픽을 끝으로 국가대표를 반납했다. 실업선수로 소속팀 경기에 집중했다. 선수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랬던 그에게 '구원 등판'을 요청하는 SOS가 날아갔다. 2년 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스스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후배들과 함께 홈 인천에서 다시 아시아 정상에 서보는 걸 상상했다. 12년 만의 금메달이 가능할까.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갔고, 멋지게 마무리했다.
이현일은 "이번에는 후배들과 함께 12년 만에 다시 금메달을 땄다. 12년 전엔 나는 대학생이었고 잘 하는 선배님들을 따라갔는데 이번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는 무대였다"면서 "서른살을 훌쩍 넘겼는데도 나의 실력을 인정해주고 불러주셔서 흔쾌히 태극마크를 다시 달았다"고 말했다.
돌아온 베테랑 이현일이 큰일을 했다. 그는 이번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전략적으로 대표팀에 복귀했다.
그의 나이 올해 34세. 이미 전성기를 훌쩍 넘긴 백전노장이었다. 전성기 때는 단식 세계랭킹 1위까지 올랐었다. 복식에 비해 단식이 취약한 한국에서 이현일은 국제 경쟁력이 가장 높았던 선수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세 차례 올림픽에 도전했지만 결국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4위가 최고 성적. 2%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현일은 2012년 런던올림픽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경기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이현일을 단체전의 구원 투수로 긴급 요청했다. 중국과 일본을 잡기 위해선 경험이 풍부한 이현일이 필요했다. 단체전 세번째 단식 경기를 이현일에게 맡기는 게 최선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현일은 이번 대회 일본과의 8강전에서 매치 스코어 2대2에서 우에다 다쿠마에 2대1 역전승을 거뒀다. 1세트를 내주며 벼랑 끝에 몰렸지만 차분하게 2~3세트를 가져오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한국은 이현일 덕분에 기사회생하면서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그의 역할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23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벌어진 중국과의 배드민턴 남자 단체 결승전 매치 스코어 2-2에서,우승을 확정하는 다섯번째 매치를 따냈다. 분위기가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열살이 어린 중국의 영건 가오후안(24)을 2대0(21-14 21-18)으로 제압했다. 한국이 매치 스코어 3대2로 우승했다. 2002년 부산대회 이후 12년만에 정상에 올랐다.
이현일은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웃지 않았다. 경기를 지배한 끝에 침착하게 경기를 매조졌다. 이현일 카드는 대성공으로 마무리 됐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마친 이현일의 얼굴은 매우 편안해보였다. 연신 활짝 웃었다. 경기 때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가족 얘기를 할 때는 살짝 흥분했다.
그는 첫 단식 주자 손완호가 중국의 천룽을 2대0으로 잡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금메달을 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같은 단식을 하는 후배 손완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천룽을 제압했다.
구원 등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현일은 이제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더이상 할 일이 없다. 그는 단식 경기엔 출전하지 않는다. 후배들을 응원하고 즐기면 된다.
그는 "이제 정말 대표팀은 끝인 것 같다. 앞으로는 대표팀에서 복귀하라는 요청이 없을 것이다. 후배들이 잘 해낼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 배드민턴은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위해서라도 이현일에게 더이상 기대서는 안 된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현일에게 높은 벽 처럼 느껴지는 중국을 상대하는 노하우를 물어봤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중국에 한창 성장하는 선수들을 보면 우리 선수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가 좀더 욕심을 갖고, 시합할 때 승부욕을 갖고 싸워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실력차는 거의 없다." 인천=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