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 장군 후손들 명량 측 고소
영화 '명량'(감독 김한민)에서 악인으로 묘사된 배설(1551~1599) 장군의 후손들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후손들에게 고통을 줬다며 제작사와 감독을 상대로 고소했다.
15일 배설 장군의 후손 경주 배씨 문중의 (소설·영화 명량 관련)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는 경북 성주경찰서에 '명량'의 김한민 감독, 전철홍 작가, 소설의 김호경 작가를 형법상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배설 장군은 영화 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살해하려 하고 거북선을 붙태우고 도망치다 부하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비대위는 고소장에서 총 4곳이 허위사실이다"라고 주장하며 "1700만명이 넘는 관객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해 실존 인물인 배설 장군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지적한 4곳은 칠천량 해전 장면, 이순신 장군 암살 시도, 거북선 방화, 도망치던 중 거제현령 안위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 장면 등이다.
조선왕조실록과 난중일기를 종합해 보면 비대위가 지적한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배설 장군은 1597년 경상우수사가 돼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의 명을 받아 한산도 본영에서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했다.
배설은 웅천을 급습해 잘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수십 척을 상실했다.
이후 칠천량해전 초반 싸움에서 패한 뒤 저녁에 원균이 여러 장수를 소집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으나, 7월 16일 적의 대선단이 원균의 주력 부대를 공격해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배설은 전세를 관망하다가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돼 안전을 도모했다.
이후 한산도로 물러난 뒤 군사 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뒤 한 때 그의 지휘를 받았으나 1597년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허가를 받은 뒤 도망쳤다.
조정에선 전국에 배설 장군의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찾지 못하다가 1599년 선산에서 권율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참형됐다.
하지만 그 뒤 그가 쌓은 무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됐다.
비대위 측은 "소설 작가와 영화 제작사 측은 지금까지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으면서 언론을 통해 무책임하고 적반하장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영화의 성공에 편승한 금전적 보장 따위가 아니라 훼손된 선조 배설 장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하나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명량'의 제작사 빅스톤픽처스 관계자는 한 매체를 통해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민원이 들어온 상태다. 배설 장군을 극중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답변할 것이다. 창작물은 창작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배설 장군 후손들 주장에 "배설 장군 후손들, 다소 억울할 듯" "배설 장군 후손들, 도망친 건 맞다는 얘기인가" "배설 장군 후손들, 대화 시도 했었구나"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스포츠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