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초등학교 6학년 이범영, 1m80의 키는 단연 우월했다. 서울시 강동구의 축구교실에서 일주일에 3번 취미로 축구를 했다. 이웃 성일초등학교 골키퍼로 차출됐다가 당시 이태엽 장안중 감독(현 원삼중 감독)의 눈에 들었다. 공부 깨나하던 아들이 뒤늦게 축구를 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의 걱정은 컸다. 아버지가 말했다. "일주일 고민해본 후 다시 얘기하자." 어린 이범영은 일주일간 밤새 고민했다. "축구를 하겠습니다."
#. 날아오는 공에 맞서 맨땅에 몸을 던졌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피멍이 가실 날 없었지만 원래 다들 그러는 줄 알았다. 컨테이너 합숙소에서 고된 훈련을 이어간지 5개월째, 부모님은 용단을 내렸다. 허정무 감독이 1기생을 뽑던 용인축구센터(원삼중-신갈고)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홍명보호 골키퍼' 이범영(25·부산)의 축구인생을 바꾼 장면이다. 인조잔디에 맘껏 몸을 던지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 김보경, 이승렬, 오재석, 동급 최강 에이스들과 용인축구센터 1기생으로 만났다. 25명 선수 가운데 무려 18명이 연령별 대표였다.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컵을 휩쓸었다. 2학년으로만 이뤄진 팀이 전국대회에서 3학년들을 이기는 사건을 냈다. 승부차기에 유독 강했던 '강심장' 이범영은 이 팀의 '수호신'이었다.
'이범영'이라는 골키퍼가 만들어지기까지 좋은 스승이 참 많았다. 김봉수 A대표팀 GK코치, 신의손 부산 GK코치, 정광석 전 원삼중 감독(현 용인시청 감독), 유영록 전 원삼중 GK코치(현 수원FMC GK코치),김동훈 GK코치(현 경남 코치) 그리고 장필규 신갈고 GK 코치(48)까지. "선생님 복이 있다"는 말에 장 코치는 "난 한 일이 없다"며 손사래 쳤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복이 많아서 이 선수를 만났다."
장 코치는 '고등학생' 이범영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떠올렸다. "다들 범영이의 큰키를 말하지만, 내가 가장 마음에 든 건 골키퍼로서 범영이의 성격이었다." 1m90대 만화같은 키에 호수처럼 담담한 표정을 지닌 선수에게 마음을 뺏겼다. 골키퍼의 기본인 냉정함을 가졌다. 1~2m 앞에서 슈팅을 때려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배짱이 있었다. 겉보다 속이 단단한 선수였다. "악하거나 독한 것은 아닌데, 범접할 수 없는 뭔가 있었다. 그걸 '카리스마'라고 하나."
▶잊지 못할 '승부차기' 대혈투의 기억
시작은 늦었지만, 백지상태의 이범영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였다. 물론 큰 신장은 최고의 축복이었다. 장 코치는 센터에 오기 직전까지 서울체고에서 '천재 키퍼' 차기석을 지도했었다. "1m90의 기석이를 만나면서 왜 큰 선수가 필요한지를 알았다. 볼 수 있는 궤적이 다르다. 모서리, 사각지역도 손으로 툭 건드릴 수 있다. '기럭지' 차이는 크다 . 범영이의 키는 2m에 육박했고, 양팔을 좍 벌리면 3m에 달했다."
이범영은 고2때부터 주전을 꿰찼다. 장 코치는 한 학년 위 선배를 전학 보냈다. "골키퍼는 후배에게 밀리면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 뛸 수 있는 팀으로 보냈다." 이범영은 한살 아래 동생 이범수(전북)와도 골키퍼 포지션에서 경쟁했다. 장 코치는 경쟁보다 순리를 중시했다. "범수가 14~15세 연령별 대표에 뽑혔다. 부모의 기대도 컸다. '범수아빠'라고 부르는 이도 생겨났다. 나는 운동을 떠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 범영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잘되든 못되든 장남인데, 내 앞에선 범수아빠라고 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일렀다." 장 코치는 이범영을 중용했다.
이범영은 2012년 런던올림픽 잉글랜드와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스터리지의 슈팅을 막아냈다. 올시즌 서울전에선 페널티킥 2개를 연속으로 막아냈다. PK 선방 능력은 이미 학생 때 검증됐다. 비결은 자신감이었다. "범영이가 2,3학년때 신갈고는 22연승을 달렸다. 전국대회에서 4~5회 우승했다. 토너먼트에서 결승까지 가려면 평균 2번 이상 승부차기를 거친다. 승부차기는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범영이를 믿었다." 골대 앞에서 장 코치의 주문은 늘 같았다. "한번 자신있게 해봐!"
이범영은 중고교를 통틀어 9개의 최우수 골키퍼상을 휩쓸었다. 장 코치는 평생 잊지 못할 '레전드급' 경기를 떠올렸다. "광양제철고와의 전국체전, 연장접전끝에 승부차기까지 갔다. 우리쪽 1-2-3번 키커가 연거푸 실축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범영이가 상대 3번 키커를 막아냈다. 2-0이었다. 범영이는 스텝을 밟고 한바퀴를 돌고 난리가 났다. 이후 무려 양팀 각 12명의 선수가 차례로 나섰다. 결국 5대4로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내가 웬만해선 긴장하는 성격이 아닌데 끝나고 나니 손에 땀이 흥건하더라." 승부차기 선방의 진수를 보여줬다. "오두방정을 떨어가며 죽을 힘을 다해 '기싸움'을 이겨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건 누가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장 코치는 내로라하는 엘리트 출신은 아니지만, 자타공인 '최고의 선생님'이다. 실업선수를 거쳐 유소년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장 코치는 낮은 자세로, 소박하게 제자들과 눈 맞출 줄 안다. "나는 프로까지 가지 못했다. 내 스타일대로 키운다면 나 정도 밖에 안될 거라 생각했다. 좋은 선수의 자질을 가진 선수라면 그 장점을 살려줘야지, 굳이 내 색깔을 입히고 싶지 않았다."
장 코치는 "대표팀에 갈 골키퍼를 길러내는 유소년 지도자로서 기본에 충실했다"고 말했다. 열린 마음으로 제자를 대했지만, 기본에 있어서만큼은 무서운 스승이었다. 확고부동한 원칙이 있었다. 이범영은 신갈고 시절 골키퍼로서의 몸 관리법을 배웠다. '몸은 거짓말 안한다. 노력한 만큼 새겨진다.' 장 코치의 지론은 지금도 한결같다. "순발력 강화를 위해 제자리에서 짧게 달리는 운동을 정말 많이 시켰다"고 했다. 골키퍼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순간스피드를 위한 근력이 절대 필요하다. "범영이는 선수로서 마인드가 확고했다. 복근-웨이트 몇 세트를 지시하면 꾀부리는 법이 없었다. 2학년이 되면서 몸이 완전히 달라졌다. 단단한 식스팩이 새겨졌다. 이종격투기 K-1에 내보내도 될 정도였다"며 웃었다. "골키퍼들의 동물적 반사신경은 결국 부단한 반복훈련의 결과다. 눈보다 근육이 먼저 판단할 때까지, 몸이 알아서 반응할 때까지."
골키퍼는 외로운 자리다. 필드플레이어의 등을 바라본 채, 상대팀 11명과 나홀로 싸우는 자리다. 제2, 제3 골키퍼는 기약없는 기다림에도 길들여져야 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이운재가 그랬듯, 절체절명의 순간, 국민적 기대의 무게도 견뎌내야 한다. 브라질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스승은 벌써부터 제자의 마음고생이 걱정이다. "때론 지금 아닌 다음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범영아, 브라질월드컵 출전을 축하한다. 넌 항상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진다면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선생님이." 전영지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