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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 논란,협회-연맹-감독 침묵은 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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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도 있지만, 절대로 타이밍을 놓쳐선 안되는 일도 있다. 침묵은 금이지만, 때로는 말 한마디가 천냥 빚도 갚는다.

'박은선 성별 진단 논란'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11월 초, 여자축구계는 '박은선 논란'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무관심속에 진행되던 WK-리그가 가장 뜨겁게 주목받은 순간이었다. 박은선의 소속팀 서울시청을 제외한 6개 구단 감독들은 지난해 11월 감독자 회의에서 박은선의 출전자격에 의문을 제기했다. '2013년 12월 31일까지 출전여부를 정확히 판정하여 주지 않을시 서울시청팀을 제외한 실업 6개 구단은 2014년도 시즌을 모두 출전거부한다는 의견'이라는 회의록이 공개됐다. 서울시청 측은 즉각 대응했다. '논란의 여지 없이 여성인 박은선에 대해 여성이 아니라며 성별 진단을 요구한 것은 인권침해이자 언어적 성희롱'이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제출했다.

석달여만에 답변이 나왔다. 인권위는 24일 오후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박은선 성별 진단 논란은 전형적인 성희롱 행위'라고 판시했다. 대한축구협회장에게 성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 6개 구단 감독 코치 등 6명에 대한 징계조치를 권고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대한체육회장, 대한축구협회장, 한국여자축구연맹회장에게 재발방지 대책 마련도 권고했다.

지난해 11월 감독회의 간사 역할을 해던 이성균 수원FMC 감독은 논란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고양대교 감독도 성적부진 등의 이유로 물러났다. 당시 회의참석자 가운데 인천 현대제철, 부산 상무, 전북KSPO, 충북 스포츠토토 등 4개 구단 감독이 남았다.

공은 다시 축구계로 넘어왔다. 25일 여자축구연맹은 "이번 사안은 연맹이 컨트롤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났다. 대한축구협회의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상부기관으로 공을 넘겼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아직 인권위로부터 공식 문서를 받지 못했다. 공식문서를 받기까지 2~3주 정도 더 걸린다고 한다. 협회 변호사를 통해 국제축구연맹(FIFA)의 사례 등을 폭넓게 검토하고 있다. 징계 여부 및 수위는 그 이후에나 발표가능할 것같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은 25일 스포츠조선과의 통화에서 "은선이가 제주도 훈련중 한 실업팀 감독과 우연히 마주친 일이 있다. 위로도 사과도 받지 못했다. 이후 더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박은선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자주 눈물을 보였고,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 나서기를 꺼렸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담도 받았다. 뒤늦게 여자축구연맹이 중재에 나서 감독들이 사과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박은선이 마음을 닫았다. "사과받을 일도 없고, 사과받고 싶지도 않다. 사과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서 감독은 "11월 초에 일이 생긴 후 최소한 은선이에게 문자나 전화로라도 사과할 기회가 있었다. 12월 WK-리그 드래프트장에서 6개 구단 감독들은 모두 우리를 외면했다.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 '잘지내냐'라고 따뜻한 한마디라도 건넸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최선은 축구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제자의 성별 진단을 운운했던 스승들이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서야 했다. 차선은 협회나 연맹 차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자체적으로 해결할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성희롱'이나 '인권침해'로 판시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즉각적인 기준이라도 마련했어야 했다. 끌어도 너무 끌었다. 그 사이 사제간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인권위가 '성희롱'으로 판시했고, 징계를 권고했다. 인권위 판단을 기다린다더니, 결정이 발표됐는데도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지난 4개월간 충분한 논의와 의견수렴을 거쳤다면 내부 결론이 궁금하다. 이미 언론 보도자료를 통해 인권위의 결정이 만천하에 공개된 마당에 또다시 2~3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WK-리그는 아직 2014년 일정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통상 3월 중순 이후 개막하는 스케줄대로라면 2~3주 후는 늦어도 너무 늦다. 개막에 맞춰 4개 구단 감독 징계를 발표할 참인가? 여자축구 부흥이 절실한 시점에 WK-리그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K-리그, 남자축구대표팀이었더라도 이러했을까.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