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빈(34). '왕비호' 독설로 유명해진 개그맨이다.
히트 친 그 상품 이후 그는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이어왔다. 약혼녀 정경미와의 연애와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는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본업인 '개그맨'으로서의 활발한 방송활동은 아니었다.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던 윤형빈. 그가 단 하나의 '사건'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단숨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개그맨이 아닌 격투기 선수로서 그가 일으킨 파문. 연예와 스포츠계를 동시에 아우른 메가톤급 임팩트를 던진 사건이었다.
윤형빈은 지난 9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로드FC 14회 대회 스페셜 메인이벤트에서 일본의 타카야 쓰쿠다를 링에 눕혔다. 1라운드 4분19초 만의 TKO 승. 반전 드라마같은 짜릿한 승리였다. 5분-2라운드로 펼쳐진 이날 경기. 윤형빈은 초반 살짝 불안했다. 타카야의 펀치에 휘청거리며 팬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하지만 이내 안정을 찾은 윤형빈은 상대의 펀치를 몸을 숙이며 피하면서 오른손 강펀치를 타카야의 왼쪽 턱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윤형빈의 왕비호 사진이 담긴 핸드폰을 거만하게 흔들며 "개그맨이냐 게이냐. 개그맨에게 질 수는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타카야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타카야에 올라탄 윤형빈은 파운딩 세례를 쏟아부었고 심판은 저항불가인 타카야의 상태를 확인한 뒤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임수정 사건'의 복수혈전이 가미된 유쾌 통쾌 상쾌 반전 드라마.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요즘 유행하는 우스갯소리로 2002년 월드컵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이날 윤형빈의 격투기 데뷔전은 단숨에 역대 '로드 FC' 경기 중 최고 시청률이자 평소의 두배 넘는 기록을 세웠다. 케이블채널 수퍼액션 생중계 '로드 FC 14'는 평균 시청률 2.6%, 최고 시청률 7.2%(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로 케이블 채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그 중 윤형빈의 라이트급(70kg 이하) 매치는 평균 시청률 7.1% 기록했다. 이날 '최고의 1분' 역시 타카야 츠쿠다를 TKO승으로 꺾은 윤형빈의 펀치장면으로 집계됐다. 이날 경기를 지켜본 파비앙, 이외수, 유승우, 신소율, 지석진, 서경석, 하하, 김창렬, 낸시랭, 혜리, 리지, 김예원, 이기광 등 수많은 유명인이 감동의 메시지를 쏟아내며 윤형빈의 도전과 승리가 만들어낸 감격 시대에 동참했다.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한 '209 윤형빈 의거'. 그는 과연 어떻게 '개그맨'에서 전 국민의 응원과 관심을 한 몸에 모으는 '국민 파이터'로 변신했을까. 해답은 국민 정서와 예능 트렌드의 절묘한 접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임수정'발 반일 정서, '개그맨' 윤형빈을 움직이다
윤형빈의 격투기 선수 변신. 그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출발점에 '임수정 사건'으로 강화된 반일감정이 안개처럼 깔려 있다. 유명 여자격투기 선수인 임수정은 지난 2011년 7월 일본 방송 TBS의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일본 남자 개그맨 3명과 경기를 벌였다. 예능인줄 알았는데 리얼이었다. 임수정은 린치를 당한 끝에 전치 8주의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당시 일본 개그맨들인 남자 출연자들은 헤드기어를 착용했지만 임수정은 보호장구 없이 경기를 벌였다. 심지어 상대 남자 선수들은 한달간 미리 연습을 했고, 그 중 한 명은 입식 타격경기인 K1 대회 출전 경험이 있는 '준 선수'였다. 임수정이 폭행 수준의 수모를 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동영상으로 퍼지자 한국 누리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그냥 '개그맨'이던 윤형빈도 분기탱천했다. 해당 영상을 접한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비열한 경기였다. 같은 개그맨끼리 3대 3으로 제대로 붙어보자"라는 글을 게재했다. 또한 해당 방송국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로 안되면 몸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종합격투기 선수로의 변신을 선언하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복수'를 선언하고 나선 한 개그맨의 변신. 그 드라마같은 출발 선상에 관심이 모아질 수 밖에 없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일본 정치권의 극우 행보도 국민적 공분을 자극했다. 아베 정권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위안부 할머니 등 과거사 사과 문제, 독도 문제 등에 있어 사사건건 극우 행보를 보이며 반일 감정을 강화했다.
▶관찰과 리얼의 예능 트렌드, '파이터' 윤형빈을 완성하다
윤형빈의 격투기 선수 변신. 문제는 그 과정을 담아낼 그릇이었다. 때마침 예능 프로그램 전반에는 관찰과 리얼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윤형빈의 변신 과정은 방송사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훌륭한 컨텐츠였다. 윤형빈은 지난 2012년 방송된 KBS2 예능 프로 '남자의 자격'에서 매회 진지하게 몸만들기 미션을 수행했다. 78일간 유산소 운동을 성실하게 이행해 남성지 표지 모델에 최종 선택되며 화제를 모았다. 케이블 채널 XTM '주먹이 운다'를 통해서는 강인한 파이터로의 변신 과정을 선보였다. 프로그램이 첫 선을 보일 당시 스파링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던 그였지만 성실함으로 꾸준히 도전한 결과 프로 파이터급 선수 변신이란 결실을 맺었다. 예능 프로라기보다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던 모습.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성실한 도전을 통해 데뷔전 승리를 따낸 윤형빈의 변신 과정은 큰 감동과 함께 색다른 볼거리를 안겼다. 윤형빈 본인에게도 '도전하는 연예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며 화려한 '제2의 전성기'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격투기 스승 서두원은 XTM '남자의 기술'에 출연해 "윤형빈이 고교 시절 인근 3개 학교를 아우르는 학교 짱이었다"고 깜짝 증언을 하며 '강한 남자' 윤형빈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곱상한 외모로 여장이 어울리던 남자 개그맨의 반전 과거. 윤형빈은 한껏 부푼 기대에 멋지게 부응하며 폭발 직전의 관심에 불을 당겼다. 한 예능인의 위대한 도전기. '관찰과 리얼'의 예능 트렌드와 접목되면서 풍선처럼 팽창한 관심이 데뷔전 짜릿한 승리로 대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