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아시아 축구의 롤 모델이다."
사실 티에리 앙리(37·뉴욕 레드불)에게서 그런 멘트를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립서비스'나 들으면 다행일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앙리는 18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푸마 에보파워 런칭행사의 주인공이었다. 그를 취재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8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기자들과 스페인, 잉글랜드 기자들이 질문 우선 순위였다. 아시아 기자들은 따로 만나 인터뷰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정말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싶었다. 인터뷰를 요청하고 '하늘의 뜻'에 맡겼다.
▶앙리와 한국의 인연
앙리를 만나기전, 한국과의 인연을 찬찬히 정리했다. 생각보다 앙리는 한국과 인연이 깊었다.
첫 등장은 인상적이었다. 1997년 6월 19일 말레이시아 쿠칭 사라왁 스타디움이었다. 세계청소년축구대회(20세 이하) B조 2차전에서 맞붙었다. 당시 한국은 이관우 김도균 양현정 박진섭 조세권 심재원 안효연 등 나름 호화멤버들을 갖추고 있었다. 1차전에서 남아공과 비기며 어느 정도 가능성을 봤다. 2차전 프랑스와도 나름대로 해볼만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꿈은 경기 시작 1분만에 물거품이 됐다. 앙리였다. 시작하자마자 골을 넣으며 찬물을 끼얹었다. 다비드 트레제게의 추가골로 2-0으로 앞서던 전반 10분 앙리는 프랑스의 3번째 골을 넣으며 쐐기를 박았다. 2대4 한국의 패배. 기세가 꺽인 한국은 3차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3대10으로 대패한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국 팬들의 머리 속에는 '앙리'라는 두 글자가 확실하게 새겨졌다. 1년 후 프랑스에서 열린 1998년 월드컵에서 앙리는 3골을 터뜨리며 프랑스의 우승에 기여했다.
두번째 인연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불과 일주일여 앞둔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이어졌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한국은 앙리의 프랑스와 맞붙었다. 1년전 프랑스는 한국을 대구에서 5대0으로 격파했다. 1년 사이에 달라진 모습을 체크할 수 있는 한 판이었다. 한국의 수비진은 선발출전한 앙리를 꽁꽁 묶었다. 앙리는 전반만 소화하고 벤치로 물러났다. 한국은 2대3으로 석패했다. 월드컵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날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국은 4강 신화를 썼다.
4년 뒤 독일 라이프치히, 세번째로 만났다. 2006년 독일월드컵 G조 2차전이었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끌던 한국은 1차전 토고와의 경기에서 2대1로 승리했다. 여세를 몰아 프랑스와 만났다. 상대편에는 앙리가 있었다. 빠른 발로 한국 수비진 뒷공간을 파고 들었다. 전반 9분 선제골을 집어넣었다. 이후 파상공세를 펼친 한국은 후반 36분 박지성의 천금같은 동점골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경기 후 앙리는 박지성 설기현 등과 악수하며 정을 나누었다.
앙리가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TV프로그램 출연 때문이었다. 2007년 앙리는 한 예능프로에 출연, 특유의 예능감을 선보였다. 지난해 앙리가 '스포츠조선' 취재진과 만나 다시 이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 한국 팬들이 열광한 것도 이 때 보여준 깊은 인상 때문이었다.
▶앙리, '한국은 아시아의 롤모델'
에보파워 런칭 행사를 마치고 앙리는 아시아 기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한국 매체는 '스포츠조선' 하나 뿐이었다. 각 대륙 혹은 나라별로 딱 5분의 시간만 배정받았다. 결국 할 수 있는 질문은 단 하나였다. 논의 결과 동남아에서 온 취재진의 질문이 선택됐다. 아시아 축구에 대한 인상과 유럽축구와의 격차 줄이기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질문을 한 동남아 취재진은 "아시아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기 위해 애쓰지만 쉽지 않다. 해결방법을 말해달라"고 덧붙였다.
"아시아선수들이 유럽에 많이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입을 연 앙리는 "한국이나 일본을 보라. 이미 많은 선수들이 유럽에서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질문을 한 동남아 취재진이 머쓱해졌다. 앙리의 발언은 이어졌다. 그는 "이곳 바르셀로나에도 한국 등 아시아 유스 선수들이 많이 있다. 아시아는 이미 국제 축구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앙리는 '한국'을 본격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한 나라의 축구가 발전하려면 국내 리그는 물론이고 유스 시스템 등이 잘 정착되어야 한다"면서 "최근 월드컵에서 아시아권, 특히 한국이 일구어낸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다. 국내 리그와 유스 시스템 등을 바탕으로 많은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했다. 그를 통해 월드컵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한국은 아시아 축구의 좋은 롤모델이다"고 말했다. 앙리의 대박 멘트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앙리, 아스널을 말하다
아시아 기자들과의 만남 후 다시 앙리를 만난 것은 전체 인터뷰에서였다. 아스널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앙리는 아스널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2001~2002시즌, 2003~2004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우승을 일궈냈다. 이것을 끝으로 아스널은 더 이상 EPL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앙리는 아스널을 떠나 바르셀로나에 둥지를 틀었고 현재는 미국 뉴욕 레드불에서 뛰고 있다. 올 시즌 아스널이 EPL에서 선두권 경쟁을 하고 있다. 때문에 아스널의 전설인 앙리의 멘트 하나하나가 더욱 중요했다.
앙리는 "아스널을 떠난 이후에도 꾸준히 그들의 경기를 본다"면서 "올 시즌 출발이 너무나도 좋다. 지금도 꾸준히 나아가고 있어 너무 인상적이다"라며 기뻐했다.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앙리는 "벵거 감독은 아스널의 팀 철학을 바꾸었다"면서 "벵거 감독 특유의 축구 철학으로 팬들의 믿음을 얻었고 모든 이들의 존경까지 받고 있다. 최고의 감독이다"고 극찬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뛴 바르셀로나에 대해서도 "시즌 전 감독이 바뀐 것을 감안하면 전반기 승점 50점은 나쁘지 않은 결과"라면서 "여전히 잘하고 있으며 멋진 팀이다"고 말했다. 바르셀로나(스페인)=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