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2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에이스 스티브 칼튼은 27승10패, 평균자책점 1.97, 310탈삼진을 올리며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그해 필라델피아는 정규시즌서 59승97로 동부지구 6개팀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필라델피아가 거둔 승리의 절반 정도가 에이스 칼튼의 몫이었던 셈이다. 1972년의 필라델피아는 팀 창단 이후 최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튼을 빼면 선발, 불펜 가릴 것없이 볼만한 투수가 없었다. 타선에서도 3할 타자가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렉 루진스키가 타율 2할8푼1리에 18홈런, 68타점으로 팀내 최고 성적을 냈을 뿐이다. 악조건 속에서도 칼튼은 41경기에 등판해 27승이나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선발-불펜-마무리 체제가 갖춰진 60년대 후반 이후 칼튼처럼 팀내 비중이 컸던 에이스는 없었다.
팀성적이 나빠도 에이스는 각광받는다. 20승 투수에 대한 갈망이다. 국내 프로야구의 마지막 20승 투수는 2007년 두산의 다니엘 리오스다. 그해 22승을 거둔 리오스는 정규시즌 MVP를 거머쥔 뒤 일본으로 떠났다. 토종 투수가 20승을 올린 것은 1999년 현대 정민태가 마지막이었다. 팀당 경기수는 1991년 이후 126~133경기를 오르내렸다. 그러나 20승 투수는 배출 비율이 점점 낮아졌다. 지난해 최다승 기록은 삼성 배영수, SK 세든의 14승이었다. 20승이라는 말은 이제 꺼내기도 힘들어졌다. '카리스마' 넘치는 선발 에이스가 없어진데다 팀마다 불펜 가동율이 높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올시즌 또다시 20승 투수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두산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다. 2011년 데뷔했으니, 올해가 국내 무대 4년째다. 지난 3년간 38승을 따냈고, 첫해 15승이 시즌 최고 기록이다. 니퍼트를 20승 후보의 선두주자로 꼽은 것은 경력과 실력 면에서 가장 우수하기 때문이다. 두산 타선과 불펜진이 도와주고, 풀타임 30경기 선발등판을 무난하게 소화한다면 20승에 가장 근접한 투수가 니퍼트라는 이야기다. 그의 강점은 꾸준함과 강력한 체력이다.
니퍼트와 함께 돋보이는 선발투수는 넥센 브랜든 나이트다. 지난 2009년 삼성서 데뷔해 올해가 국내 무대 6번째 시즌이다. 지난 5년 동안 통산 47승을 올렸고, 2012년 30경기서 208⅔이닝을 던져 16승을 따내며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올해도 넥센의 에이스는 나이트다. 더욱 강력해진 넥센 타선과 불펜의 도움이 뒷받침된다면 20승을 충분히 올릴 수 있다.
지난해 24번의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한 롯데 셰인 유먼도 20승 후보다. 지난 시즌 유먼은 31경기에 나가 13승4패, 평균자책점 3.54를 기록했다. 특히 퀄리티스타트 부문 1위에 오르며 가장 믿을만한 선발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도 유먼은 장원준, 송승준, 옥스프링 등을 제치고 개막전 선발이 유력할 정도로 롯데 투수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두 번째 1군 시즌을 맞는 NC의 찰리도 20승에 가까운 투수다. 지난 시즌 2.48의 평균자책점으로 이 부문 1위에 올랐고, 퀄리티스타트도 23번이나 기록했다. NC는 이번 겨울 FA 이종욱 손시헌을 데려왔고, 외국인 선수를 4명이나 보유하는 등 전력 상승이 뚜렷해진 팀 가운데 하나다.
이밖에 롯데 옥스프링, 넥센 밴헤켄 등 국내 무대 경험이 많은 외국인 투수들도 20승을 바라볼 수 있는 정상급 선발투수다. 하지만 토종 선발로 20승을 기대할 수 있는 투수는 마땅치 않다. KIA 윤석민이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떨어진다. 15승 이상의 경험이 있는 삼성 배영수와 장원삼, SK 김광현, NC 손민한 등도 거론할 수 있지만, 변수가 너무나 많다. 새롭게 선을 보일 외국인 투수들은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20승을 논하기 힘들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