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생생히 목격한 경기다.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3 9라운드, 후반 중반까지 0-2로 앞서 간 강원이 적지에서 서울이라는 대어를 낚는 듯했지만, 후반 34분부터 후반 42분까지 무려 세 골을 퍼부은 상대의 세찬 몸부림에 도리어 낚싯대마저 부러지고야 말았다. '서울 극장'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경기를 강원 입장에서 다시 본다면 어떨까. 희망과 아쉬움을 동시에 발견한 '조연' 강원의 플레이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서울 원정에 임한 김학범 감독은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지난주 경남전에서 진경선-박민의 수비형 미드필더 라인을 가동하고, 앞선에 이준엽-지쿠-이종인을 배치했던 강원이 이번엔 이른바 '진경선 시프트'를 강행한 것. 지난 8라운드까지 주로 플랫 4 앞을 감싸거나, 측면 수비의 공백을 메웠던 이 선수가 이번엔 왼쪽 측면의 높은 지점에서 뛰게 됐다. 이로써 이번 서울전에서는 최전방 지쿠 아래 진경선-웨슬리-패트릭-이준엽이 일렬로 섰고, 남궁웅-배효성-김진환-김오규로 이뤄진 플랫 4 라인 사이에는 박민 홀로 자리했다. 객관적인 전력 차가 작지 않은 서울을 상대로 한 이런 변화는 모험적인 요소가 꽤 컸던 선택이었다.
이는 강원이 경기를 괜찮게 풀어나간 후반 중반까지 '완벽하지는 않았어도 꽤 괜찮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전체적인 라인을 낮게 형성했던 강원은 박민 앞에 위치한 패트릭-웨슬리 역시 아래로 내려가 공간을 좁히며 수비에 적극 가담해 실점의 빌미를 최소화했다. 두껍게 세운 수비를 바탕으로 한 공격 전개는 어떠했느냐. 강원은 주로 최전방에 위치한 지쿠를 겨냥해 역습을 시작하려 했는데, 전남으로 이적해간 웨슬리만큼 빠른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이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스피드 경합에서 한 수를 접고 들어갔을 때, 김학범 감독은 차라리 지쿠처럼 볼을 잡아두고 다시 동료에게 뿌려줄 수 있는 선수가 적합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또, 밑에 일렬로 배치한 자원들이 앞으로 나가면서 함께 골문을 노려보겠다는 심산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경선의 자리를 옮긴 이유도 확실히 드러났다. 지난 대구전에서 오버래핑을 시도하던 차두리의 뒷공간으로 아사모아의 침투가 끊임없이 이뤄졌는데, 강원에서 이 역할을 수행한 건 진경선이었다. 김용대의 실책성 플레이로 이끌어낸 패트릭의 선제골에 이어, 전반 38분 아디의 자책골을 이끌어낸 크로스가 이 선수의 발끝에서 터졌으니 성과는 거둔 셈. 전체적으로 역습을 전개하는 패스의 정확도나 템포의 아쉬움도 컸고, 전방에서 볼을 잡아놓은 선수들 주위로 빠른 접근이 이뤄지지 못해 완성도가 그리 높았던 건 아니지만, 8라운드까지 PK 2골-세트피스 2골을 넣는 데 그쳤던 강원에 필드골이 터졌다는 건 분명 고무적이었다.
물론 측면을 택한 만큼, 중앙에서는 계속해서 균열이 생기곤 했다. 특히 데얀과 몰리나가 부지런히 중앙 미드필더-수비 사이 공간으로 움직이며 그 좁은 공간에서 연계 플레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서울 공격진에게 이는 좋은 먹잇감이 됐을 것이다. 그러던 중 골 라인 끝까지 접근한 상대 윙어들이 낮고 빠른 크로스를 제공하는 장면에서 중앙의 공간을 충실히 메우질 못해 몇몇 위기를 초래했으며, 또한 중앙 수비 앞 공간에서 하대성과 데얀에게 중거리 슈팅을 고스란히 내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박호진의 기가 막힌 선방과 너나 할 것 없이 육탄 방어에 동참한 수비라인, 그리고 약간의 운이 작용하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후반 27분, 김학범 감독은 중대한 선택을 내린다. 조금 더 공격적인 교체를 택할 수도 있었으나, 이미 70분을 넘기던 시점이었고 또 최전방 지쿠가 아디와의 경합을 통해 어느 정도의 역할은 해주고 있었기에 굳이 무리할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판단한 듯했다. 서브에 있던 김은중이나 한동원을 투입해 추가 득점을 노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겠지만, 일단은 한 골이라도 지키는 것이 승리에 더 가까운 방법이었을 터. 김학범 감독은 패트릭 대신 이창용을 투입해 중원의 기동력을 끌어올림으로써 안정을 기하려 했다. 측면 수비가 본업이었던 이 선수는 포지션 변경을 통해 개막전부터 중원을 견고히 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문제는 그다음부터 일어났다. 수비형 미드필더 진영에 힘을 실어줄 이창용의 투입 자체가 문제였다기보다는 서울이 호시탐탐 노리던 아크 정면에서 고요한의 한 방이 터진 게 강원으로선 화근이었던 것. 좁은 공간에서 놀라울 만큼 빠른 템포로 터진 고요한의 슈팅이 연이어 강원의 골문 구석을 찔렀고, 잠시 뒤에는 데얀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거쳐 골망을 흔들었다. 고명진-하대성 라인에서 뿜어내는 전진 패스와 그 앞에서 여러 움직임을 통해 강원 수비를 끌어내던 공격진들, 여기에 피니셔의 개인 능력을 통한 마무리 능력까지 나왔을 때, 강원은 허탈하게 무너져야만 했다. 김학범 감독 말대로 "강원이 못해서가 아니라 서울이 잘해서 이긴 경기"가 아니었을까. 강원으로서 참 잘 싸운 경기였지만, 서울이 야속할 정도로 조금 더 잘한 경기였다.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