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모범생이 어쩌다 한번 실수로 중간고사 1등을 놓쳤다고 치자. "에이, 그럴수도 있지 뭐."라고 툭툭 털어낼 수 있는 유형이 있는 반면, "이게 말이 돼? 아, 어쩌지? 이제 난 끝이야"라며 스스로 패닉에 빠져드는 유형도 있다.
삼성은 올 시즌 이른바 '최강의 스펙'을 자랑하며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팀이다. 초반 부진 이외에는 큰 고비 없이 1위를 고수했다. 전력 전반에 있어 어느 한 부분 뒤쳐짐이 없다. 마치 모든 과목을 두루 잘하는 '모범생'이자 '전교 1등'의 이미지다. 선수들도 스스로 '우리가 최강'이라는 자부심이 뚜렷하다.
류중일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지난해 이후 삼성은 이렇다 할 위기를 겪지 않은 채 승승장구했다. 잘 풀릴 때는 이런 점이 '막강한 자신감'이라는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이 있다. '위기에 대한 면역성'마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한번 1등을 놓친 샌님 모범생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패닉에 빠져드는 형국이다. 2012 한국시리즈에서의 삼성이 딱 그렇다.
초반 2연승을 거뒀을 때, 삼성의 덕아웃에는 '그럼 그렇지, 역시 올해 한국시리즈 우승도 우리 차지야'라는 듯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경기장에서 만난 선수들의 표정에도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시리즈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그런데 3차전에서 역전패를 당하자 이런 표정이 일순간 사라졌다. 몇몇 선수들은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패배를 납득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한 선수는 "그렇게 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큰 실망감을 표현했다. 여전히 시리즈 전적은 2승1패로 앞서고 있음에도, 그래서 2승만 더 거두면 우승을 하는데도 삼성은 크게 풀이죽어있었다.
반면, SK 덕아웃은 활력이 넘쳐흘렀다. 겨우 1승을 따냈지만, 벤치 분위기는 마치 곧 우승을 눈앞에 두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초반 5점차의 열세를 뒤집고, 삼성의 막강 불펜을 두들겨 역전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기세의 차이는 4차전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SK 선수들은 격정적인 세리모니로 기세를 끌어올렸고, 삼성 선수들은 크게 위축된 듯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시리즈 전적은 2승2패로 같아졌다. 모든 것이 원점에서 새로 시작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시점에 삼성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데미지 극복'이다. 단기전은 전력의 우열 못지 않게 기세 싸움도 매우 중요하다. 심리전이 경기 결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어차피 전력은 서로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는 시점이다. 새로 추가될 전력도 없고, 특별히 이탈한 자원도 없다.
때문에 삼성이 지난해에 이어 한국시리즈 2연패를 하기 위해서는 '데미지 관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새삼 류중일 감독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지난해 지휘봉을 잡은 이후 류 감독은 늘 선수들을 믿고 맡기는 배려의 리더십을 보여줘왔다. 그러나 이는 지금과 같은 특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선수들이 스스로 패닉에 빠져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류 감독의 '데미지 관리기법'이 얼마나 잘 발휘되느냐에 삼성 우승의 향방이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