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열린 제32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박해일은 '최종병기 활'로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됐다. 멋들어진 중절모를 쓰고 무대에 오른 그는 수상 소감 중 모자를 벗어 보였다. 삭발한 모습을 깜짝 공개한 것. 당시 박해일은 "아주 기가 막힌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삭발한 이유를 밝혔다. 박해일이 바로 그 영화로 돌아온다. '은교'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박해일을 만났다.
▶"70대로 살아본 느낌은…"
'은교'는 70대 시인이 은교란 이름의 싱그러운 소녀에게 매혹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박해일은 70대 노인으로 변신했다. 평균 8시간이 걸리는 특수분장을 하고 연기를 해본 느낌이 어땠을까?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께 정말 특수분장을 한번 해드리고 싶어요.(웃음) 말로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어려운 면이 있었죠. 특수 분장에 익숙해져야 감정 연기가 나오기 때문에 초반에 적응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최대한 저를 특수분장팀에 맡겼죠. 특수분장팀이 좁은 공간에서 제일 많이 고생을 하셨어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제일 큰 숙제는 결국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내느냐였어요. 특수분장은 두번째였죠. 감독님, 배우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저에겐 큰 도전이었고 해보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작품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아직까지 70대 노인의 느낌이 조금 남아 있다"는 그는 "전체적으로 느린 삶을 살게 됐다"고 말했다. "요즘은 쉴 때도 특별하게 뭘 하질 않아요. 멀리 가지 않고 그냥 동네 약수터에 가거나 운동장을 걷는 정도죠. 재미가 없으면 살짝 뛰기도 하고요. 격한 운동을 하면 다칠 것 같고 '이게 되겠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박해일의 그녀' 김고은, 도대체 누구?
박해일의 복귀작으로 주목 받고 있는 '은교'는 파격적인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다. 박해일과 호흡을 맞추는 17세 소녀 은교 역에 '생짜 신인' 김고은(21)이 발탁된 것.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인 그녀는 이번 작품이 데뷔작이다. 높은 수위의 노출 연기를 선보여 개봉 전부터 '핫피플'로 떠올랐다. 박해일은 "나도 어떤 배우인지 굉장히 궁금했다"고 했다.
"은교의 신선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님도 신인이길 바랐어요. 물론 한 작품으로 이 사람에 대해 다 알 순 없지만, 굉장히 과감한 구석이 있고 호기심도 강한 것 같아요. 처음 보고는 '저 모습이 나의 은교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현장에서의 적응력도 빠르고 신인 같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어 "낯설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이 있다. 다음이 기대되는 배우"라고 밝힌 박해일은 '은교'에 대해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지만, 한 가지로 정리되는 영화는 아니에요. 등장인물의 나이대와 성별이 너무 다르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나이대나 성별도 그럴 것이고요. 관객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저도 궁금해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얽히고설키는 그들의 관계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할리우드 진출 물어보니
지난 2000년 연극 '청춘예찬'으로 데뷔했다. 이후 '질투는 나의 힘', '국화꽃 향기', '살인의 추억', '연애의 목적', '괴물', '극락도 살인사건', '모던 보이', '이끼' 등을 통해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어느새 국내를 대표하는 배우로 우뚝 섰다. "박해일 선배가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후배 배우들의 얘기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더 멋진 선배들이 많은데 왜 저를…"이라고 웃어 보인 박해일은 "열심히 잘 해나가야죠. 그런데 부담이에요. 뭔가 스스로에게 제약이 되는 것 같아서요. 감사하긴 하지만, 저에겐 그냥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배우라고 봐주시는 게 가장 큰 칭찬이에요."
그런 그에게 할리우드 진출 계획에 대해 물어봤다. 최근 몇 년 사이 이병헌 장동건 전지현 등 국내 톱스타들이 잇따라 할리우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굉장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알고 있어요. '심장이 뛴다'를 찍으면서 김윤진씨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 만약 그런 목표가 생겼다면 이미 말씀 드렸겠죠. 아직은 그런 욕심이 안 생겨요. 지금 당장은 제 앞가림부터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웃음) 국내 관객들에게 더 인정받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아요."정해욱 기자 amorry@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