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으로 대구는 완벽하게 '스타들의 무덤'이 돼버렸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미녀새' 옐레나 이신바예바(29·러시아)였다.
대회 첫날부터 계속된 '프로그램 책자의 저주'의 4번째 제물이 됐다. 프로그램 책자의 표지모델로 찍히면 좋지 않은 결과를 냈다. 이신바예바는 남자장대높이뛰기의 스티븐 후커(29·호주), 100m의 우사인 볼트(25·자메이카), 110m 허들 데이런 로블레스(25·쿠바)의 뒤를 이었다.
2년전 베를린의 악몽이 대구에서 재현됐다. '미녀새'가 추락했다.
올림픽 2연패, 세계선수권대회 2연패. 세계신기록 27번(실외 15번, 실내 12번). 세계기록(5m06) 보유자. 이제 화려한 수식어를 뒤로 하고, 은퇴를 고려할지도 모를 일이다.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재기무대로 삼으려 했던 이신바예바가 30일 열린 여자 장대높이뛰기 결선에서 4m65의 저조한 기록으로 6위에 그치며 날개를 접었다. 마지막 3차시기를 앞두고 평소보다 길게 입으로 주문을 외워봤지만 소용없었다. 지난 2년간의 공백은 너무 컸다.
화려한 재기를 노리던 이신바예바의 이번 대회 준비과정은 치열했다. 지난 3월, 5년간 자신을 가르쳤던 비탈리 페트로프 코치와 과감히 결별을 택하고 전성기를 함께 했던 예브게니 트로피모프 코치의 품에 다시 안겼다. '인간새' 세르게이 부브카(은퇴)를 키워낸 세계적인 지도자 페트로프를 등질 정도로 지난 2년간의 부진을 만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트로피모프 코치를 찾아가 이유없이 그를 해고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고 재결합했을 정도로 자존심도 버렸다. 세계선수권대회를 몇개월 앞두고 훈련 방식과 프로그램을 모두 새로 짜는 모험도 감수했다.
15세까지 체조선수였던 이신바예바를 장대높이뛰기의 세계로 이끈 이가 바로 트로피모프 코치. 이신바예바는 그와 함께 세계신기록 23개를 합작했다. 고국 러시아에서 5개월간 맹훈련한 끝에 대구로 입성했다.
이날도 경기 시작 30분 전부터 연습을 하며 컨디션을 점검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여느때처럼 흰 수건으로 머리를 가린 채 트랙 위에 드러누웠다. 집중하려는 의도다. 다른 선수 경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순간 2009년 베를린세계선수권을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2년전 이신바예바는 베를린에서 시작 높이인 4m75를 한 번도 넘지 못하며 그대로 무너졌다. 하향세가 시작된 시점이다. 이후 2010년 3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세계실내육상선수권대회에서 4m60을 넘는데 그쳤다. 충격을 받은 이신바예바는 잠정 휴식을 선언했다.
2년뒤 대구. 결선 1차시기를 4m65로 결정했다. 경쟁자인 지난 세계선수권자 안나 로고우스카(30)와 모니카 피렉(31·이상 폴란드)이 1차시기를 4m70으로 잡은 것에 비하면 자존심이 상할 법했지만 베를린의 악몽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전략의 실패였다. 4m65를 한번에 뛰어넘은 이후 4m70을 건너뛰고 4m75를 택했다. 경쟁자들이 차근차근 높이를 올려가며 컨디션을 점검했지만 이신바예바는 여전히 누워만 있었다. 경쟁자들의 탈락 속도가 느려지면서 다음 차례까지 30분 넘게 휴식을 취했다. 근육이 굳었다. 4m75 1차시기는 실패했다. 우승을 노리고 곧바로 4m80으로 수정했지만 2차시기 역시 실패. 마지막에는 모험을 택했다. 익숙했던 장대를 다른 장대로 바꿨다. 그리고는 3차시기 이전까지 온 몸을 수건으로 감싼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다. 관중들의 기대, 그리고 평소보다 길었던 준비 동작. 다 소용없었다. 바도 넘지 못한 채 '미녀새'는 그대로 매트 위로 추락했다. 이신바예바는 경기후 "나에게 맞는 장대를 가져 오지 못했다. 장대를 바꿨는데 모두 맞지 않았다. 너무 부드러웠다. 점프는 잘 날았는데 장대가 낚싯대처럼 돼버렸다"며 장대를 탓했다.
대구국제육상대회 여자 장대높이뛰기에서 4연패를 이룬 이신바예바. '약속의 땅' 대구는 끝내 그를 외면했다. 2013년 조국에서 열리는 모스크바세계선수권대회를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이미 선언한 이신바예바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대로라면 이조차 장담할 수 없다.
대구=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