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복싱연맹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필자는 박성춘 회장과 함께 충북 보은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년체전 선발전을 서울팀 응원 격려차 참관했다. 89년 만 26세에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30년이 지나 경기장을 찾은 필자의 감회는 남달랐다. 체육관으로 입장하자마자 아주 반가운 복싱인을 만났다. 주인공은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홍기호였다. 홍기호는 개그맨 홍기훈의 사촌 형이기도 하다. 홍기호가 특별히 반가운 이유는 2002년 해체됐다가 2014년 손석민 총장의 강력한 의지로 재창단된 서원대 복싱부에서 학생과장을 맡아 복싱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실무자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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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충북 괴산 출신인 홍기호는 전재완 씨가 운영하는 청주복싱체육관에서 복싱과 인연을 맺었다. 훤칠한 키에 잘 다듬어진 체격, 깨끗한 마스크에 차분한 성품의 홍기호는 청주 형석고 2학년 때 복싱에 입문한 이래 고교 졸업 때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선수였다. 서원대에 진학한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김유현(당시 경희대)에게 패했지만, 김유현이 부상으로 최종 선발전에 불참하자 홍기호는 무주공산에 무혈입성하며 태릉에 입촌한다. 소프트웨어는 부족했지만, 중량급답지 않게 체력이 엄청 뛰어났다. 태릉선수촌에서 실시하는 새벽 운동에서 '불암산 오토바이' 문성길이 유일하게 등을 바라보고 뛰었던 선수가 바로 홍기호였다. 천하의 황영조가 마라톤 경기에서 단 한 번도 이봉주의 등을 바라보고 뛰지 않았다고 회고했지만, 문성길에게 홍기호는 호적수였다. 물론 그 후엔 오토바이에 시동이 걸리면서 문성길의 독주가 진행됐지만. 문성길과 경쟁하면서 시너지효과가 발생해 체력이 더욱더 보강된 홍기호는 일취월장 실력이 급상승했다. 그해 홍기호는 제8회 킹스컵대회와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주목을 받는다. 특히 남북 경기에서 박기철, 권현규, 김현호 등은 패했지만, 홍기호는 북한 이운용과의 준결승에서 1, 2라운드 열세를 딛고 3라운드에서 활화산처럼 터지는 연타를 쏟아부으며 역전에 성공, 우승컵을 들어 올린 쾌거였기에 기쁨은 배가되었다. 83년엔 라이트 미들급으로 출전한 로마월드컵 최종 선발전에서 숙적 이해정(한국체대)에게 3대2로 판정승하며 본선에 진출한다. 85년 호주컵 동메달에 이어 제12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홍기호는 이듬해 86년 서울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에서 미들급으로 출전, 신준섭을 2차례 다운시키고도 고개를 숙인다. 숙적 신준섭에게 3연패를 당하는 순간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홍기호는 곽귀근(당시 상무)에게 패하자 운동을 중단한다. 하지만 이듬해 89년 오산 전국체전에서 몸만 풀고 경기에 출전했지만, 후배 복서들이 그의 강타에 펑펑 나가떨어지면서 우승을 차지하자 복귀를 결심한다. 그때 그의 나이 만 27세. 당시는 25세 전후가 되면 은퇴하는 게 관례였다. 김광선, 허영모, 문성길, 김동길, 신준섭, 이남의, 박기철, 정용범, 이해정 등 대부분의 선수가 예외 없이 그랬다. 하지만, 홍기호는 본인의 18번째 국제대회인 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도 박세종을 꺾고 본선에 출전, 동메달을 획득하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그리고 바로 모교인 서원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한마디로 홍기호라는 인물은 서원대 복싱 역사에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끝인 상징적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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