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체대 출신 선후배들의 각종 행사에 초청을 받고 참석해 보면 흡사 '별들의 전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각 종목에서 북극성처럼 독야청청한 체육인을 많이 접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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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은 유년 시절부터 기라성 같은 삼촌들에게 틈틈이 복싱을 지도받으며 복싱을 접하게 됩니다. 박기철은 74년 중학교에 입학하자 '광주체육관'에 입관, 본격적으로 복서로서의 꿈을 키웁니다. 이 체육관은 유옥균, 오영호, 김광민, 김동길, 이현주, 진행범, 김종섭, 이남의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의 집합소'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대한민국 최고의 사설체육관이었죠. 박기철은 중3 때인 76년 제26회 학생선수권대회 코크급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며 복싱인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77년 전남체고에 입학한 박기철은 대뜸 전남대표로 대통령배대회에 출전, 국가대표 마수년에게 패하며 성장통을 겪지만 78년 세계선수권 2차 선발전 결승에서 설욕하며 우승하는 등 이후 마치 아우토반이 광활하게 펼쳐진 듯 쾌속 질주를 하며 박기철의 시대가 도래함을 알립니다.
79년도엔 드디어 한국 복싱사에 기념비적인 이정표를 세웁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치러진 제1회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밴텀급에서 우승한 것이죠. 1929년 한국 복싱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의경 선생에 의해 이 땅에 '조선 권투 구락부'가 창설된 이후 정확히 반세기 만에 복싱사상 최초로 세계대회 정상 정복의 꿈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 금메달 획득의 영광 속에 숨겨진 얘기가 생각나네요. 경기 전날 '예비 계체량'을 통과한 박기철은 3일 후에 경기가 있음을 담당 코치에게 통보받고 식사를 한 후 느긋하게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던 다음 날 부랴부랴 달려온 코치는 박기철에게 "오늘 경기가 있다"고 말하며 급히 '체중 체크'를 지시합니다. 당시 박기철은 밴텀급 한계 체중에서 무려 2.5kg이나 오버였다 하네요. 땀복을 입고 필사적으로 줄넘기를 한 후 이어진 미트치기에도 체중이 원하는 만큼 줄지 않자 급기야 한증막에서 살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감수하며 장시간 체중과의 긴긴 씨름을 한 후에 가까스로 계체량을 통과합니다.
탈진 상태에 빠진 박기철은 정상적인 경기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최악이었죠. 가장 늦게 계체량을 가까스로 통과한 박기철은 1시간 남짓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경기에 나섭니다. 링에 오른 박기철은 경기 날짜를 잘못 전달한 코치가 얼마나 미웠을까요. 다혈질인 그의 입에선 욕이 쏟아졌죠. 1회전 상대는 캐나다의 마이클 니켈이란 사우스포였죠. 공이 울리자 다리가 풀려 후들거리는 상태에서 초반부터 수세에 몰립니다. 경기 주도권을 뺏긴 채 방어에 급급하며 전열이 흐트러지자 약세를 감지한 상대는 박기철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어 맹공을 펼치면서 압박해 나갑니다. 박기철은 코너에 처박혀 속수무책으로 펀치를 허용합니다. 예상된 결과였죠. 한데 니켈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회심의 왼손 카운터를 날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코너에 몰려 수양버들처럼 흐느적거리던 박기철이 로프 반동에 의해 상체가 앞으로 쏠리면서 반사적으로 내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와 들어오던 니켈의 안면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정면충돌(?)하며 상대는 그대로 녹아웃되고 말았고, 그것으로 경기는 종료되었습니다. 천우신조란 말은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요. 그때 미국 헤비급 대표로 출전한 세기의 스타 조 프레이저의 아들 마비스 프레이저가 박기철의 라커룸에 찾아와 그의 오른손을 만지면서 '한국에서 온 강타자'라고 치켜세우는 등 '퍼포먼스'를 연출하자 졸지에 박기철은 강펀처로 둔갑, 언론의 주목을 받습니다. 사실 박기철은 강펀처와는 거리가 먼 '히트 앤드 런'식 경기를 펼치던 아웃복서였죠. 그래서였을까요. 2회전에서 만난 일본 복서도 박기철의 강타(?)를 의식하다가 한 차례 다운을 당하는 등 완패를 했고, 3회전에서 만난 불가리아 복서도 박기철의 포스에 전의를 상실한 채 시종일관 클린치를 연발하다 결국 실격 처리되고 마는 해프닝이 벌어졌죠. 이어 결승전에서 만날 것으로 예상됐던 소련 선수가 프랑스 마게니아의 변칙 페이스에 말려 어이없이 판정패하자 박기철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여유를 보였죠. 결국 프랑스의 마게니아에 완승,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복싱 역사를 새로이 쓴 주인공으로 탄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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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절치부심 맞이한 84년. 박기철은 LA올림픽을 앞두고 금메달을 목표로 강훈을 소화해 내며 정신을 집중합니다. 박기철은 국제무대에서 두 차례 패한 쿠바의 루돌프 오르타와 한 차례 패한 북한의 여연식이 참가하지 않는 LA올림픽이 그에게 은퇴 경기로는 최고의 기회였던 셈이었죠. 하지만 박기철은 고향 광주에서 훈련하면서 훈계받는 도중에 체벌을 당하자 욱하는 성질에 그만 복싱을 접어버리고 맙니다. 당시 그의 나이 23세. 전성기였죠. 이순을 눈앞에 둔 박기철은 당시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자책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인 거죠. 주마가편이란 말이 있습니다. 정점에 서 있을 때 더욱더 자신을 담금질함으로써 진일보된 성장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고 아울러 스스로에 냉철해져야 한다는 교훈을 상기시키는 고사성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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