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한국 아마복싱의 역사 박기철을 만나다

최재성 기자

기사입력 2018-06-08 16:44

<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11. 한국 아마복싱의 역사 박기철을 만나다

요즘 한국체대 출신 선후배들의 각종 행사에 초청을 받고 참석해 보면 흡사 '별들의 전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각 종목에서 북극성처럼 독야청청한 체육인을 많이 접하곤 합니다.

얼마 전 레슬링 국가대표 감독 출신 유종현 선배의 자녀 결혼식장도 예외는 아니었죠. 2012년 런던올림픽에 체조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하여 양학선이라는 걸출한 선수의 체조 역사상 첫 금메달이라는 금자탑을 탄생시킨 조성동 감독이 제 '레이다' 에 포착되더군요. 그분은 체조계에서 '히딩크'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분이죠. 마침 그분과 동행한 일행 중에 한국체대 4회 졸업생 '복싱인 듀오' 박기철, 이남의 선배가 있어 반갑게 동석했습니다. 이분들은 전남체고-한국체대 동기동창으로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동반 출격하여 각각 금과 은을 따낸 동료이자 '관포지교' 같은 친밀한 관계죠.


◇왼쪽부터 체조의 조성동 감독, 복서 출신 박기철과 이남의.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이 중 박기철(편의상 존칭은 생략합니다)은 비록 주니어대회이긴 하나 세계대회 첫 정상 정복을 달성한 한국 아마 복싱사의 상징적인 인물이죠. 그래서 '복싱 히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발탁하여 그의 비화를 지면을 통해 한 올 한 올 벗겨 볼까 합니다.

박기철은 솔직 담백하고 가식 없는 호탕한 성품을 지닌 복싱패밀리죠. 그의 막내 삼촌이 라이트웰터급으로 72년 뮌헨올림픽,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연달아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박태식입니다. 박태식은 75년 킹스컵대회에서는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된 한국을 대표하는 베테랑 복서였죠. 77년 12월엔 무명의 고교생 조용래에게 패하자 '대이변'이란 문구와 함께 신문 1면에 게재될 정도로 스타복서이기도 했죠. 둘째 삼촌인 박 청도 멕시코올림픽 선발전 밴텀급에서 육군 소속의 이광우와 자웅을 겨뤘던 파이터였습니다. 67년 프로로 전향해 염동균, 김갑수, 서수강, 현수만 등 강적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한때 동양 밴텀급 1위까지 올라선 정상급 복서이자 투지 좋은 파이터로 원로복서들은 기억하더군요. 그는 멕시코 출신의 밴텀급 세계 챔피언이자 104전 88승(78KO승) 13패 3무를 기록한 전설적인 KO왕 루벤 올리바레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치열한 타격전 끝에 6회 KO패 당하는 등 인상적인 경기들을 펼쳤으며, 종합전적 31전 11승 14패 6무를 기록한 복서였죠. 박 청의 전적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31전 중 11차례가 동양 타이틀전을 비롯한 해외 원정경기였고, 말 그대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전전후로 싸웠던 역전의 용사였기 때문이죠. 박 청은 72년 최문근을 KO로 잡은 후 링을 떠납니다. 그때 받은 파이트머니로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자신에게 가방과 운동화를 사줬다고 박기철은 회고하더군요. 이 삼촌은 박기철이 고교 2학년 때인 78년 지병으로 삶을 등졌죠.

박기철은 유년 시절부터 기라성 같은 삼촌들에게 틈틈이 복싱을 지도받으며 복싱을 접하게 됩니다. 박기철은 74년 중학교에 입학하자 '광주체육관'에 입관, 본격적으로 복서로서의 꿈을 키웁니다. 이 체육관은 유옥균, 오영호, 김광민, 김동길, 이현주, 진행범, 김종섭, 이남의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의 집합소'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대한민국 최고의 사설체육관이었죠. 박기철은 중3 때인 76년 제26회 학생선수권대회 코크급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며 복싱인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77년 전남체고에 입학한 박기철은 대뜸 전남대표로 대통령배대회에 출전, 국가대표 마수년에게 패하며 성장통을 겪지만 78년 세계선수권 2차 선발전 결승에서 설욕하며 우승하는 등 이후 마치 아우토반이 광활하게 펼쳐진 듯 쾌속 질주를 하며 박기철의 시대가 도래함을 알립니다.

79년도엔 드디어 한국 복싱사에 기념비적인 이정표를 세웁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치러진 제1회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밴텀급에서 우승한 것이죠. 1929년 한국 복싱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의경 선생에 의해 이 땅에 '조선 권투 구락부'가 창설된 이후 정확히 반세기 만에 복싱사상 최초로 세계대회 정상 정복의 꿈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 금메달 획득의 영광 속에 숨겨진 얘기가 생각나네요. 경기 전날 '예비 계체량'을 통과한 박기철은 3일 후에 경기가 있음을 담당 코치에게 통보받고 식사를 한 후 느긋하게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던 다음 날 부랴부랴 달려온 코치는 박기철에게 "오늘 경기가 있다"고 말하며 급히 '체중 체크'를 지시합니다. 당시 박기철은 밴텀급 한계 체중에서 무려 2.5kg이나 오버였다 하네요. 땀복을 입고 필사적으로 줄넘기를 한 후 이어진 미트치기에도 체중이 원하는 만큼 줄지 않자 급기야 한증막에서 살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감수하며 장시간 체중과의 긴긴 씨름을 한 후에 가까스로 계체량을 통과합니다.


탈진 상태에 빠진 박기철은 정상적인 경기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최악이었죠. 가장 늦게 계체량을 가까스로 통과한 박기철은 1시간 남짓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경기에 나섭니다. 링에 오른 박기철은 경기 날짜를 잘못 전달한 코치가 얼마나 미웠을까요. 다혈질인 그의 입에선 욕이 쏟아졌죠. 1회전 상대는 캐나다의 마이클 니켈이란 사우스포였죠. 공이 울리자 다리가 풀려 후들거리는 상태에서 초반부터 수세에 몰립니다. 경기 주도권을 뺏긴 채 방어에 급급하며 전열이 흐트러지자 약세를 감지한 상대는 박기철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어 맹공을 펼치면서 압박해 나갑니다. 박기철은 코너에 처박혀 속수무책으로 펀치를 허용합니다. 예상된 결과였죠. 한데 니켈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회심의 왼손 카운터를 날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코너에 몰려 수양버들처럼 흐느적거리던 박기철이 로프 반동에 의해 상체가 앞으로 쏠리면서 반사적으로 내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와 들어오던 니켈의 안면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정면충돌(?)하며 상대는 그대로 녹아웃되고 말았고, 그것으로 경기는 종료되었습니다. 천우신조란 말은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요. 그때 미국 헤비급 대표로 출전한 세기의 스타 조 프레이저의 아들 마비스 프레이저가 박기철의 라커룸에 찾아와 그의 오른손을 만지면서 '한국에서 온 강타자'라고 치켜세우는 등 '퍼포먼스'를 연출하자 졸지에 박기철은 강펀처로 둔갑, 언론의 주목을 받습니다. 사실 박기철은 강펀처와는 거리가 먼 '히트 앤드 런'식 경기를 펼치던 아웃복서였죠. 그래서였을까요. 2회전에서 만난 일본 복서도 박기철의 강타(?)를 의식하다가 한 차례 다운을 당하는 등 완패를 했고, 3회전에서 만난 불가리아 복서도 박기철의 포스에 전의를 상실한 채 시종일관 클린치를 연발하다 결국 실격 처리되고 마는 해프닝이 벌어졌죠. 이어 결승전에서 만날 것으로 예상됐던 소련 선수가 프랑스 마게니아의 변칙 페이스에 말려 어이없이 판정패하자 박기철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여유를 보였죠. 결국 프랑스의 마게니아에 완승,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복싱 역사를 새로이 쓴 주인공으로 탄생했죠.


◇한국체대 4회 동기들. 왼쪽부터 이윤희, 박군순, 김한석, 박기철.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박기철은 80년 한국체대에 진학하면서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린 후 성인 무대까지 접수하며 장족의 발전을 이룹니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때리는 전광석화와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죠. 80년 제4회 김명복배 페더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기철은 밴텀급 우승자 임창용(동아대)과 치열한 경합 끝에 최우수상과 함께 부상으로 상금 50만 원을 받습니다. 그해 대통령배에서도 경기 대표 김기택을 한 수 위의 기량으로 일축하고 정상에 올랐죠. 또한 모스크바올림픽 대표선발전 최종 결승에서도 천하의 황철순에 신승하며 그해 끄트머리에서 화룡점정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리고 81년. 이번엔 국제무대로 눈을 돌려 그해 LA시장배 금메달을 필두로 뉴질랜드 국제대회에서도 금메달을 건져 올렸고, 제2회 월드컵대회에선 비록 쿠바 선수에게 패했지만, 값진 동메달을 획득했죠. 그리고 이어진 82년. 제10회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에 이어 제9회 뉴델리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고교생 박용운에게 예상외로 고전했지만 관록으로 버티면서 본선 티켓을 확보합니다. 박기철은 뉴델리아시안게임 본선에서 북한의 여연식에게 패했지만, 값진 은메달을 획득하며 간판 복서로 우뚝 섭니다.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 페더급 준결승에서 박용운(부산 금성고)과 싸우는 박기철(오른쪽).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삼촌인 박태식도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의 노용수에게 패해 은메달에 그쳤는데 본인도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북한 선수에 패해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더군요. 여담이지만 한국은 이전에도 뮌헨올림픽에서 이석운이 북한의 김우길에게 패했고,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황철순이 북한의 구영조에게 패하는 등 남북경기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던 77년?10월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제8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오인석(당시 한국체대)이 76년도 몬트리올올림픽 라이트플라이급 은메달리스트인 북한의 이병욱을 꺾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통령 축전이 날아오는 등 마치 종합우승한 듯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며 환호했을 정도로 남북경기는 치열했죠.

그리고 절치부심 맞이한 84년. 박기철은 LA올림픽을 앞두고 금메달을 목표로 강훈을 소화해 내며 정신을 집중합니다. 박기철은 국제무대에서 두 차례 패한 쿠바의 루돌프 오르타와 한 차례 패한 북한의 여연식이 참가하지 않는 LA올림픽이 그에게 은퇴 경기로는 최고의 기회였던 셈이었죠. 하지만 박기철은 고향 광주에서 훈련하면서 훈계받는 도중에 체벌을 당하자 욱하는 성질에 그만 복싱을 접어버리고 맙니다. 당시 그의 나이 23세. 전성기였죠. 이순을 눈앞에 둔 박기철은 당시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자책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인 거죠. 주마가편이란 말이 있습니다. 정점에 서 있을 때 더욱더 자신을 담금질함으로써 진일보된 성장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고 아울러 스스로에 냉철해져야 한다는 교훈을 상기시키는 고사성어죠.


◇한국 아마복싱 사상 첫 세계대회 금메달리스트 박기철.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박기철은 85년 동인천중학교에 교사로 첫 부임하여 복싱부를 창단하는 등 9개 학교를 유랑하며 봉직하다 2010년 명예퇴직하고 현재 인천 북항에서 방역업무를 담당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간절히 꿈꿔 온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열정과 간절함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박기철 선배에게는 생고무 같은 끈기와 인내심이 부족했죠. 만일 박기철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절박함 속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면 김동길, 김광선, 문성길, 신준섭, 박시헌, 이해정 등과 함께 한국 아마 복싱사 최고의 반열에 우뚝 섰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 박기철….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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