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불굴의 파이터 최요삼을 추억하며...

최재성 기자

기사입력 2018-04-26 11:39

<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8. 불굴의 파이터 최요삼을 추억하며...

30년 전 용산공고에서 최요삼 챔프와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복싱부 제자들 10명이 얼마 전 절 찾아왔습니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에 다다른 옛 제자들과 지난 추억을 공유하기 위해 문성길 챔프도 합류시켜 지난날을 회상하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지요. 당연히 오늘 히스토리의 주인공은 용산공고 출신의 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최요삼입니다. 특히, 지난 19일은 필자가 최요삼과 인연을 맺은 지 30주년 되는 뜻깊은 날이어서 지난날을 반추하며 스토리를 시작할까 합니다.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시절의 최요삼.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문성길 전 챔프(앞줄 왼쪽)와 용산공고 출신 복서들.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89년 4월 19일은 필자가 군 복무를 마치고 친정인 88프로모션에 트레이너로 복귀하여 신생 용산공고팀을 맡은 뜻깊은 날입니다. 당시 문성길은 WBA 밴텀급 챔프였고, 김용강은 WBC 플라이급 챔프였죠. 최요삼은 만 16세의 신입생이었습니다. 이팔청춘의 혈기왕성한 젊음이 솟구쳐오르는 나이였습니다. 신라의 화랑 관창이 단기필마로 계백 장군 진영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순국할 때가 16세였고, 김유신 장군이 천관녀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것도 16세였죠. 또한, 천재 작곡가 장덕이 진미령이 부른 '소녀와 가로등'을 작곡할 때도 16세였습니다. 꿈이 무르익은 16세 소년 최요삼도 이때 사나이의 모든 것을 걸고 복싱에 투신했죠. 필자의 지도자 원년인 89년은 가수 태진아의 '옥경이'란 곡이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전파를 타고 전국에 메아리치던 한해로 기억됩니다.

최요삼은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 복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나브로 숨어 있던 잠재력이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면서 두각을 나타냈죠.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의 꿈이 뭐냐고. 그는 망설임 없이 경희대에 특기생으로 진학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더군요. 당시엔 경희대 인맥이 복싱판을 좌지우지했죠. 최요삼은 선천적으로 체력이 좋았습니다. 당시 부친이 마장동에서 건강원을 운영한 덕분에 몸에 좋은 보약을 많이 섭취해서인지 몰라도 한강 둔치에서 시작되는 아침 로드워크 때면 야생마처럼 달리며 발군의 실력을 뽐냈죠.

최요삼은 그해 학생선수권대회 코크급에 출전해 3연승을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했습니다. 신은철(당시 대전체고)에게 패했지만, 값진 동메달을 획득하여 필자에게 소중한 선물을 안겨줬죠. 그리고 7월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복싱계를 쥐락펴락하던 '마키아벨리' 황철순 감독의 지도를 받은 이근식(당시 리라공고)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2ㅡ3으로 판정패하면서 초년병 지도자인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체험을 안겨 줍니다. 만 26세의 초년병 코치 시절 '무형의 힘'의 위력을 안 것이죠. 코칭스태프가 힘이 없으면 선수도 무력해진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황철순이라는 난세의 영웅에 맞서 결사 항전을 다짐했죠.

겨우내 필자의 집에서 선수들과 합숙하면서 경기력을 최대한 끌어올렸습니다. 최요삼은 이듬해 90년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이근식과 다시 맞붙어 군말 없는 판정승을 거두며 대회 최우수상까지 수상,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해 회장배대회 결승에서 이광호(당시 이리고)를 꺾고 우승하면서 대학 감독들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당시 청주사대 전재완 교수가 적극적으로 스카우트 의사를 표명했죠. 하지만 최요삼은 그해 전국체전에서 강원도 대표 차관철(당시 홍천고)에게 패하면서 좌절을 맛봅니다. 심기일전하며 맞이한 91년, 필자는 졸업반인 최요삼의 전국대회 4관왕을 목표로 강훈을 마무리한 후 장도에 오릅니다. 그런데 아뿔싸. 첫 대회인 4월의 김명복박사배에 출전하기 위해 당시 경기 장소인 성남종합운동장으로 가는 도중에 최요삼이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최요삼은 용산공고 복싱부의 알파요 오메가였고, 시작과 끝이었던 존재였기에 허탈감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오르더군요.


◇92년 프로 데뷔를 앞둔 최요삼 전 챔프(오른쪽)와 필자.
최요삼은 그날 이후 아마 경기에서 자취를 감췄고, 목적 없이 체육관을 들락날락하던 93년 어느 날 럭비공처럼 종잡을 수 없던 그가 프로로 전향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최요삼을 설득해 당시 88프로모션 합숙소인 워커힐아파트 22동 1002호에 집어넣어 훈련을 시켰죠. 감회가 새롭더군요. 10년 전 그곳에서 청운의 꿈을 펼치며 프로복서 생활을 하던 필자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연이은 패배 속에 퇴출당해 결국 끌려가다시피 입대를 했던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더군요.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최요삼이 대신 풀어주길 바라면서 다시 손잡고 뭉쳤죠. 그리고 문성길이 살라자르를 상대로 9차 방어전을 치르던 93년 7월 3일 최요삼은 이태길에게 인상적인 4회 판정승을 거두며 데뷔전을 장식했고, 이듬해인 94년 1월 제23회 전국신인왕전에서 이상철을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잡으며 우수신인왕에 등극합니다. 쉼 없이 터지는 최요삼의 기관총 같은 연타는 전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죠. 경기 후 최요삼은 저에게 "선생님 한번 안아주세요"하면서 포상금 50만원을 저에게 주더군요. 여담이지만 경기를 앞두고 최요삼은 경기장인 장충체육관에 10분 늦게 도착하여 필자에게 '사랑의 매'라는 미명 아래 체벌을 당하고 링에 올랐는데…. 지금 글을 쓰면서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울컥해지는군요. 선수는 병아리(?) 때부터 휘어잡지 못하면 큰 선수가 됐을 때 다루기 힘들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죠.


그 후 최요삼이 3차례 국제 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른 95년 어느 날 당시 프로모션 염동균 사장과의 견해 차이로 저는 체육관과 결별을 합니다. 경솔한 행동이었죠. 당연히 최요삼과도 헤어짐의 절차를 밟았죠. 6년 6개월의 짧지 않은 여정이었죠. 최요삼은 그해 9월 국내 챔피언에 등극한 후 11월 신인왕전 최우수복서 출신의 양상익과 타이틀 방어전을 치렀지만, 접전 끝에 첫 패배를 당합니다. 저도 현장에서 관람했는데, 최요삼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쓰라리면서도 영양가 만점의 패배였죠. 그 패배가 없었다면 최요삼은 결코 세계챔피언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할 만큼 유익한 패배였죠. 당시 11전 전승(3KO승) 행진 끝에 당한 1패는 최요삼이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죠. 뼛속에 스며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 어찌 매화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겠습니까.

최요삼은 96년 12월 일본에서 동양 챔피언에 등극한 후 99년 10월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사만 소루자투롱이란 태국의 세계챔프를 불러들여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세계 정상에 등극합니다. 최요삼은 경기중 턱뼈가 부러져 세 조각이 되었는데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텨냈는데, 실로 경탄을 쏟아내기에 손색없는 승전보였죠. 당시 링사이드에는 국가대표 출신으로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신 김광선, 오광수 두 전직 복서가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죠. 최요삼의 손이 올라가자 묘한 표정을 짓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네요.

최요삼의 승리는 그간 한국 도전자들이 태국 챔피언에게 13차례 도전해 연속적으로 실패한 끝에 쟁취한 가뭄에 단비 같은 쾌거였죠. 최요삼은 세계적인 트레이너 이영래 씨의 지도로 일취월장, 상전벽해, 괄목상대할 복서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단언컨대 최요삼의 복싱은 이영래 씨의 탁월한 지도력에 의해 완성품으로 재탄생했죠. 마치 옥경이란 노래도 작곡가인 조운파 씨가 81년 나훈아에게 줬으나 불러보기만 하고 취입하지 않아 태진아가 다시 불러 히트를 한 것처럼 세상살이도 음양의 조화처럼 궁합이 있는 듯하네요. 최요삼에겐 행운이었죠. 최요삼의 복싱 역사에서 초창기엔 필자 같은 스파르타식 지도가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원숙기에 접어들면 경륜 있는 노련한 지도자가 필요한 법이죠.

챔피언 사만은 44전 41승(31KO승) 1무 2패의 커리어에 당시 10차 방어에 성공하면서 8차례 방어전을 KO승으로 방어한 강타자였지만, 최요삼의 영리한 복싱에 완봉패를 당했죠. 사만은 한국의 장정구, 이열우, 김광선을 세계 타이틀전에서 꺾었고, 마이크 카바할과 승패를 주고받은 세계적인 복서 움베르토 곤잘레스(멕시코)를 95년 격렬한 타격전 끝에 7회 KO승을 거둔 복서였기에 최요삼의 기량도 세계 정상급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었죠. 최요삼은 사만과 2차 방어전에서 한 차례 더 격돌, 7회 KO승을 거두면서 한 수 위의 실력임을 만천하에 여실히 증명해 보였죠. 하지만 복싱 침체기가 이어지면서 1차 방어전을 8개월 만에, 2차 방어전은 7개월 후에, 3차 방어전은 무려 13개월 만에 치르는 등 2년 4개월 동안 단 3차례의 방어전만 치를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서 악전고투합니다. 4차 방어전에서 벨트를 푼 최요삼은 연이어 두 차례 정상 탈환에 실패한 후 2007년 12월 WBO 인터콘티넨털 플라이급 1차 방어전에서 헤리 아몰(인도네시아)에게 판정승을 거뒀지만, 경기 후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며 우리 곁을 떠났죠. 최요삼은 사후 신장, 각막, 간, 심장 등을 6명에게 기증해 국내 장기 기증자 수를 크게 늘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고, 장정구, 유명우에 이어 2016년 국내 복서로는 3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얻었죠. 최요삼. 그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됐지만, 어려운 여건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던 초인적인 감투 정신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최요삼.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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