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남 순천에서 개최된 생활체육대회 복싱 경기를 참관하고 많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이 고장은 국내 최초의 세계랭커인 서정권(작고)의 탄생지이기 때문입니다. 서정권은 초창기 한국 복싱의 알파요 오메가였고,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었던 복서죠. 1929년부터 내리 2년간 전일본아마추어선수권을 석권했고, 31년에 프로에 전향, 일본 무대에서 기록적인 31연승을 거두며 복싱의 신으로 불렸습니다. 32년엔 상대가 없어 미국 무대에 진출, 한국인 최초로 세계랭킹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36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가 정신적인 붕괴로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게 되자 이를 아쉬워한 레슬러 역도산이 그의 이름으로 도장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의하면서 서정권의 복싱 인생은 전환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역도산의 어이없는 비명횡사로 서정권의 복싱 역사도 막을 내립니다.
요즘은 엘리트 체육보다 생활체육대회가 더 활발하게 운영되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른 자연스러운 패턴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화려했던 순천복싱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번 대회를 주최한 박경철 관장(45)은 현역 시절 국내 밴텀급 챔피언과 OPBF(동양태평양복싱연맹) 1위에 랭커된 복서였죠. 당시 싸움닭이라 불릴 정도로 매서운 파이팅을 선보였던 전형적인 파이터로 2000년 당시 20세의 전도유망한 우수신인왕 출신 김현숭(당시 8전전승)을 판정으로 잡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상걸, 조영주, 조삼훈, 정재광 등 당시 내로라하는 복서들과의 타격전은 승패를 떠나 관중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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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과거 순천 금당고 시절 허영모, 성광배와 함께 트로이카를 이뤄 전국 무대를 석권했던 최종달 순천복싱협회장(55)도 순천복싱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중후한 인품에 폭넓은 인간관계로 평판이 좋은 최 회장은 과거 화려했던 순천복싱이 부활하기를 기대한다고 하더군요. 그는 순천 맹호체육관 동료인 허영모가 문성길과 2차전을 벌일 때 그의 필승을 위해 직접 세컨드를 봤는데 아쉽게 패한 것이 지금도 안타깝다고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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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싱 WIBA(여성국제복싱협회)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이은혜(35)와 변교선 관장(51)도 경기장에서 만났습니다. 변 관장은 이은혜를 발탁하고 조련해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지도자죠. 이 두 사람의 만남에는 미담이 있습니다. 이은혜를 단번에 물건(?)임을 알아본 변 관장은 이은혜가 2015년 9월 태국 선수를 꺾고 WBO(세계복싱기구)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하자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척박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은혜는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이에 변 관장은 고육지책으로 직장에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월급 전액을 이은혜 훈련비로 지급하며 살신성인의 지표를 보였고, 퇴근한 저녁엔 이은혜 챔프의 트레이너로 1인 2역을 병행하며 살아온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충호단 프로모숀' 박종운 대표(42)라는 조력자를 만나 활기를 되찾으며 이 챔프는 또다시 세계 정상에 등극, 스승의 은혜에 화답합니다. 이 타이틀도 현재 2차 방어에 성공해 통산 12전 11승(4KO승) 1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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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복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복서가 성광배(54), 성동현(27) 부자 복서죠. 한국체대 42년 복싱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부자가 선후배로 연결된 케이스죠. 아버지 성광배는 88년 세계군인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서 우승한 국내 정상급 복서였죠. 84년 전국체전에서 전북 대표 황동룡을 꺾으며 수준급 기량을 보였지만, 숙적 김광선에게 여러 차례 접전 끝에 고배를 마시면서 국가대표 진입에 실패했습니다. 성광배는 전국 무대에서 9차례나 결승에 진출했지만 모두 접전 끝에 패하면서 준우승만 차지한 비운의 복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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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선수를 이끌고 이번 대회에 출전한 광주 전일복싱체육관 임홍진 관장(47)은 96년 프로복싱 준신인왕 출신으로 다채로운 연타와 패기 넘친 파이팅으로 프로모터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지만, 일찍 선수 생활을 접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지금은 최고로 인정받는 지도자 반열에 우뚝 섰죠. 그는 '정당하지 못한 승리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패배를 받아들이라'고 선수들에게 가르치며 지나친 승리 지상주의보다는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예의 바르고 모범적인 지도자죠. 이번 대회에서 임 관장의 제자 김응표가 경기에 패한 후 상대 선수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박수를 보내는 장면이 펼쳐졌는데 임 관장도 두 복서에게 밝은 미소로 화답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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