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날 덩치 큰 불청객이 체육관으로 찾아오면서 스파링을 치러게 됐답니다. 그날 백인철은 상대의 강펀치에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는 수모를 겪은 후 마천동 자취방에 틀어박혀 술잔을 기울이면서 복싱을 접을 생각까지 했답니다.
그 상대 복서는 종합격투기를 포함, 복싱스타 박종팔에게 3연승을 거둔 이효필이었습니다. 후에 극동체육관에서 재회하여 두 번째 스파링을 펼쳤는데 이번에는 백인철이 돌고래처럼 솟구치는 라이트 어퍼컷으로 끝내버렸죠. 그 사건을 계기로 이효필은 링을 떠났다는 후문입니다.
|
그러나 27전째 미국시장 진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치러진 83년 5월 첫 원정경기에서 신 메이언(미국, 15승 8KO승 2패)이란 평범한 백인 복서에게 첫 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백인철의 백인복서 트라우마의 서곡이었습니다.
그후 86년 3월 트로이 워터스(호주)와의 동양 라이트미들급 4차방어에서 백인철 스스로도 패했다고 인정할 정도로 졸전을 벌여 간신히 판정승했고, 87년 3월에 벌인 폴 제임스(호주)와의 경기에서도 다운을 주고받는 힘겨운 승부 끝에 판정승에 만족해야 했죠. 89년 5월 폴리 오벨(베네수엘라)에게 11회 KO승을 거두고 획득한 WBA 슈퍼미들급 타이틀마저도 90년 3월 2차 방어전에서 크리스토퍼 티오즈(프랑스, 35전 33승 23KO승 2패)에게 6라운드 KO패를 당했습니다. 모두 백인복서들이었죠. 백인철은 그 경기를 끝으로 47승 43KO승 3패라는 전적을 남긴 채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백인철이란 이름 그대로 '백인'에게 '철'저히 약했던 복서였죠. 백인복서와의 종합 전적은 4전 2판정승 2패(1KO패). 하지만 백인철은 지금도 박종팔, 황준석, 노창환, 유제형 등과의 라이벌전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은 기록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더군요.
여담이지만 복서 백인철은 지독한 애주가였고 박종팔은 애연가였죠. 88년 12월 박종팔(53전 46승 39KO 2무 5패)과의 경기 때는 경기 5일 전까지 폭음을 했고, 86년 6월 정상도(24전 16승 3KO승 3무 5패)와의 동양타이틀 5차 방어전을 앞두고는 아예 잠적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권재우 트레이너가 이승훈과 함께 저녁마다 온 동네방네 술집을 순찰하여 결국 경기 일주일을 남겨놓고 극적으로 검거(?)에 성공했고 연행(?)하는 과정에서 사람 좋은 권 관장도 분을 참지 못하고 백인철에게 손찌검하는 해프닝이 일어났죠. 경기 결과는 졸전 끝에 판정승.
백인철은 강한 상대와 대전할 때는 음주량을 대폭 줄였고 약한 상대와 일전을 벌일 때는 폭음을 할 정도로 상대에 따라 술을 조절해서 마시는 복서였죠. WBC 라이트플라이급 15차 방어에 성공한 복싱영웅 장정구와 거나하게 술마시다가 옷을 바꿔입고 가는 해프닝도 있었죠. 체급 차이가 커 옷이 바뀌면 금방 알아차릴 정도인데도 둘 다 몰랐다고 하니 그날 마신 술의 양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는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경기는 86년 10월에 격돌한 황소 황준석(36전 34승 23KO승 2패)과의 빅매치였다고 회고합니다. 같은 극동 출신인 황충재(31전 28승 25KO승 3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참으로 피눈물나는 훈련을 했다고 하더군요. 당시 같은 극동체육관 소속의 황충재와 스파링할 때 많이 얻어맞은 경험이 있는 백인철로서는 그 황충재를 초토화시킨 황준석과의 경기를 앞두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죠. 때려도 려도 무섭게 돌진하는 황준석의 뚝심에 그래도 망신 당하지 않고 한 차례 다운을 곁들이며 무난한 판정승을 거둔 건 술을 절제하면서 강훈한 덕분이라고 말하더군요.
백인철은 티오즈와의 경기에서 패하고 링을 떠난 후 지인을 통해 파이트머니 1억원을 주고 여수 인근 묘도라는 섬의 돌산 1만평을 사들였습니다. 일종의 투자였죠. 하지만 그는 개발제한법에 걸린 쓸모없는 돌산을 샀다고 푸념을 일삼았고, 세월이 흐른 후 거듭된 경제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돌산을 2억원에 팔고 말았습니다.
한데 아뿔싸….
쓸모없다 여긴 애물단지 돌산이 뒤늦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여수엑스포를 계기로 이순신대교가 광양까지 연결되고, 더불어 묘도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말입니다. 돌산 가격은 급등하여 현 시세로 50억원을 호가한다고 합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습니다. 돌산이 금강석으로 변모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과연 인생이란 건 럭비공처럼 어느 방향으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가 봅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