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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밖이었다. 중국세가 워낙 강했다. 잘해봐야 은메달 정도라고 생각했다. 비올림픽종목이어서 관심도 떨어졌다. 그런데 사고를 쳤다. 자랑스럽게 금메달을 든 손에는 모두 태극기가 그러져 있었다. 경기 전날 금메달을 다짐하며 손등에 그려넣었다. 다짐은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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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을 확정짓고 난 뒤 나윤경은 눈물부터 흘렸다. 자신의 세번째 아시안게임이었다. 2005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나윤경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50m 소총 3자세에서 동메달, 50m 소총 복사에서 5위를 차지하며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후 입상권과는 인연이 없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 50m 소총 3자세에서 10위를 차지했다. 2013년 창원 월드컵 50m 소총 3자세에서 7위에 올랐다. 최근 열린 2014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성적이 좋지 않았다.
경기 전 부담이 컸다. 1시리즈까지는 104.1 점을 쐈다. 좋았다. 2시리즈 들어 갑자기 밸런스가 흔들렸다. 100.5점. 이후에는 나름대로 선전했다. 616.4점로 12위에 그쳤다. 2라운드의 부진이 컸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같이 쏴준 동생들이 너무 고마웠다. 나윤경은 "내가 너무 못해서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갑상선암' 정미라 "인천 탈락 남편 위해 쐈어요
정미라는 2012년 가을을 떠올렸다. 병원에서 계속 전화가 왔다. 꼭 방문해달라는 연락이었다. 그해 11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었다. "갑상선암이 의심됩니다. 전이가 될 수도 있어요. 수술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날 정미라는 펑펑 울었다. 암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평생 총을 쏠수도 없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옆에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추병길(34·화성시청)이 있었다. 공기소총을 함께 하고 있는 추병길은 정미라를 격려했다. "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말라"고 늘 용기를 북돋우워주었다. 정미라는 용기를 냈다. 수술대에 올랐다. 떼어 낸 암덩어리는 1㎝남짓의 초기 종양이었다. 회복은 빨랐다. 정미라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 강상욱 교수님이 너무 수술을 잘해주셨다"면서 그 때를 회상했다. 수술 후 2개월만에 다시 총을 잡았다. 다들 만류했다. 하지만 정미라는 총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총을 쐈다. 2013년 7월 추병길과 결혼했다.
남편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다. 추병길은 아쉽게도 이번 아시안게임에 나서지 못했다. 정미라가 인천에 있을 때 남편은 소속팀의 전지훈련에 가있었다. 때문에 정미라에게 아시안게임에서의 한 발 한 발이 더 소중했다. 정미라는 "총을 쏠 때도 갑상선암 후유증 때문에 목이 아팠다. 남편 얼굴을 생각하며 쐈다.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이제 정미라는 26일 50m 소총 3자세에 나선다.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4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정미라는 "꼭 결선에 나가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아쉬움을 풀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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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가 울려퍼지고 태극기가 올라갔다. 다들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음빛나만 달랐다. 오른손을 쫙 펴서 오른 눈썹 위게 가져다댔다. 거수경례였다. 국군체육부대 소속인 음빛나는 육군 하사 신분이었다.
음빛나는 청원군청에서 뛰다 2012년 군에 입대했다. 어릴 때부터 군인이 하고싶었다. 군체질이었다. 부사관학교에서의 사격에서는 20발 중 19발을 맞추며 특등사수가 됐다. 입대 후 기량이 급상승했다. 지난해 국내 여자 50m 소총 복사 랭킹 11위였다. 올해 6차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2위로 통과하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세계사격선수권대회에서는 19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장기 복무신청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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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