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런던 '세계 2강' 펜싱코리아의 불편한 진실?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2-09-22 00:07


◇관중도, 열기도 없었다. 썰렁한 경기장에서 '그들만의 리그'가 진행됐다. 대한펜싱협회가 준비한 시설은 10개의 피스트와 10개의 전기심판기가 전부였다. 국제펜싱연맹 기준의 비디오 판독 시스템도 없었다. 경기를 앞두고 몸을 풀 연습장도 연습용 피스트도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선수들은 경기 직전 복도에서 몸을 풀었다.빡빡한 일정 탓에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스프레이 파스 외에는 구급약도 없었다. 국내 펜싱대회에서 선수들의 도복엔 이름조차 표시돼 있지 않다. 마스크를 쓴 선수들을 식별할 방법이 없다. 관중이나 팬들을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 열악하기 짝이 없는 세계 2강 '펜싱코리아'의 현주소다.

런던올림픽 피스트의 짜릿한 감동, 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 대한민국 펜싱은 금2, 은1, 동3으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펜싱 코리아'는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2강'이라며 자존심을 한껏 세웠다. 그로부터 한달 후, 강원도 양구군 양구문화체육관에서 열린 국내 첫 대회 현장을 찾았다. 지난 13~20일까지 전국 남녀 플뢰레 종목별 오픈, 김창환배 전국남녀선수권, 국가대표선발전이 줄줄이 열렸다. 현장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날의 열기는 오간 데 없었다.

'세계 2강' 코리아의 '초라한 현실'

비인기 종목의 현실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심했다. 양구 대회 현장은 그야말로 '동네대회' 수준이었다. 넓은 체육관에 달랑 알루미늄 피스트 10장과 전기심판기 10대가 전부였다. 플뢰레, 에페, 사브르 3종목 선수 350여 명이 좁은 대기실을 쉴새없이 오갔다. 몸을 풀기 위해 복도를 가득 메운 선수들이 요령껏 칼을 부딪쳤다. 하루종일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 두다리 뻗고 쉴 휴식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경기를 마치고 온 남자선수들은 벤치에서 웃통을 벗어제쳤다. 여자선수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옹색한 화장실로 직행했다. 체육관 곳곳, 체육관 앞 잔디밭에는 햇볕에 말려놓은 도복, 투구들이 흉하게 널려 있었다. 80만원을 호가하는 도복 한벌로 열흘 가까이 버텨야 한다. 체육관 내부엔 며칠 묵은 퀴퀴한 땀내가 진동했다.

"비디오? 그런 거 없어요"

"왜 여긴 비디오가 없죠?"라는 질문에 한 선수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비디오는 원래 없는데." 국제펜싱연맹(FIE)은 판정논란을 막기 위해 비디오 판독 시스템을 도입했다. 동시에 찌르는 두 선수 모두에게 점수를 주는 에페 종목의 경우 상대적으로 판정의 몫이 적지만, 플뢰레, 사브르의 경우 동시에 찌를 경우 판정논란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비디오'는 오심을 방지하는 장치다. 설령 판정이 번복되지 않더라도 의혹을 방지하고, 증거를 남기고, 상호간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장치다. 경기 중 2회 비디오 판독이 허용된다. 국제경기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선수들은 비디오 판독을 경험해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국제무대에서 비디오 판독은 경기 운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런던올림픽 개인전 16강에서 탈락한 남자사브르 세계랭킹 1위 구본길의 예가 대표적이다. 경기 초반 2회의 비디오 판독 기회를 써버렸다. 마지막 14-14 상황에서 동시에 공격을 하고도 포인트를 따지 못했다. 비디오 판독 기회를 모두 쓴 상황에서 항의조차 불가능했다. 비디오를 이용하는 영리한 노하우를 익혀야 할 이유다. 비디오 시스템 도입에 대해 회장사인 SK텔레콤측은 여전히 고민중이다. "비디오 장비 4대 한세트에 1억5000만원~2억원의 예산이 든다. 비디오 장비를 운용할 전문인력도 뽑아야 하고 유지, 보수에도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일부 국가만 비디오 장비를 갖추고 있을 뿐 아시아에 이 장비를 갖춘 국가는 없는 것으로 안다"며 난색을 표했다.


◇가장 주목받아야 할 결승전이 가장 썰렁했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모두 떠난 자리, 텅빈 체육관에서 파이널리스트 2명이 외로운 우승다툼을 벌였다. 결승진출자를 위한 반짝이는 파이널 피스트도, 상금도, 시상식도 없었다. 경기 후 본부석으로 와, 자신의 이름조차 새겨지지 않은 1-2-3등 트로피를 찾아 돌아갔다. 경기장엔 라커룸도 사물함도 없다. 체육관 곳곳에 선수들의 도복과 마스크 ,배낭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나마 구단 버스가 있는 실업팀은 버스가 라커룸 탈의실 휴게실 역할을 대신한다. 선수들이 옷을 갈아입은 후 땀에 흠뻑 젖은 도복을, 버스 위와, 잔디밭에 널어놓았다. 땀내가 진동하는, 채 마르지 않은 도복을 입고 속행되는 다음 경기에 나서야 한다.
소통 없는 그들만의 리그

올림픽 이후'미녀검객' 김지연 신아람 '미남검객' 구본길 오은석 '괴짜 검객' 최병철 등 메달리스트들이 스타덤에 올랐다. 비인기종목 펜싱에 김영호, 남현희 이후 처음으로 스타군단이 탄생했다. 그러나 협회 차원의 관중동원 노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일주일 전 양구에서 열린 KBS배 리듬체조대회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대한체조협회는 세계 5위에 오른 '손연재 사인회'를 통해 적극적인 리듬체조 홍보에 나섰다. 수백명의 팬들이 끝도 없이 줄을 늘어섰다. 취재진이 몰렸다. 메달리스트 10여 명을 보유한 펜싱협회는 '펜싱 알리기'는 안중에 없었다. 올림픽 이전의 폐쇄적이고 안이한 행정은 여전했다.

'소통' 없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피스트에 선 선수들 유니폼엔 이름조차 없었다.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의 도복에만 겨우 영문 이니셜이 표기된 정도였다. 마스크까지 쓴 선수들을 식별하기란 불가능했다. 플뢰레, 에페, 사브르 3종목이 10개의 피스트 위에서 동시다발로 열리는 통에 어느 종목 선수인지도 헷갈렸다. 피스트 배정 역시 경기 직전 주먹구구로 정해졌다. "관중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게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하자 협회의 한 임원은 "아휴, 그걸 어떻게 일일이 표시하냐"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선수들의 '아이덴티티'가 실종됐다. 관중에 대한 의식도, 마케팅의지도 전무했다. 결승진출자를 위한 영예의 '파이널 피스트'도 없었다. 결승에 오른 남녀 선수 4명이, 모두가 떠난 피스트에서 녹초가 된 몸으로 쓸쓸한 우승다툼을 벌였다. 상금도, 시상식도 없었다. 다음날, 자신의 이름조차 씌여지지 않은 1-2-3등 트로피를, 본부석에서 각자 사인을 하고 찾아갔다.


회장사 SK텔레콤은 뭘 하나

회장사인 SK텔레콤은 대한펜싱협회에 연간 11억5000만원을 투자한다. 2009년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이 회장으로 선임된 후 대한펜싱협회의 전체 예산 24억~25억 가운데 절반을 책임진다. 국내대회의 열악한 현실을 지적하자 SK스포츠단 관계자는 "지방대회는 협회에서 알아서 한다. 회장사는 크게 간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태릉에 입촌한 국가대표선수들의 전지훈련비를 지원하는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지방대회는 협회에서 알아서 유치하고, 지자체로부터 받은 유치비 집행도 알아서 한다. 그러나 회장사가 20~30명의 소수 국가대표들만 지원한다는 것은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대다수 펜싱선수들에 대한 명백한 직무유기다. 일부 엘리트 선수들만이 회장사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대외적인 성적에만 열 올릴 뿐, 정작 열악한 현장에서 눈을 돌린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같은 SK그룹이 회장사인 대한핸드볼협회와도 간극이 크다. 핸드볼의 경우 최태원 SK 회장이 대회를 직접 챙길 뿐 아니라, 관계자가 국내대회 현장에 상주하며, 지휘한다. 2주 가까이 계속된 양구 펜싱대회 현장에서 회장사 관계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한국 펜싱계에 모처럼 찾아온 봄날이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양구=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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