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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은 대뜸 "죄송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묻자 "8000점 돌파를 약속했는데 도달하지 못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국내 육상인들과 팬들에게 너무 죄송할 따름이다"고 했다. "훈련 기록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8000점은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회가 이렇게 끝나고 나니 시원섭섭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한국 10종 경기의 대들보 김건우(31·문경시청)와 함께 29일 대구스타디움을 돌아다니며 단독 인터뷰했다.
김건우는 전날 밤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대회를 마쳤다. 7860점(30명 중 17위)으로 자신이 2006년 작성한 종전 한국기록(7824점)을 36점 경신했다.
날이 밝은 뒤 반나절 만에 다시 찾은 곳에서 전날의 감동과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대구스타디움은 평생 잊지 못할 곳이다. 지금까지 한국기록을 네번 작성했는데 어제까지 세번을 이 곳에서 세웠다. 앞서 이 곳에서 열린 2003년 유니버시아드와 2005년 전국육상대회 때 한국기록을 세웠다"며 한참 동안 경기장을 바라봤다.
심호흡한 그는 "하지만 좀 더 확실히 준비하고, 좀 더 분석하고 경기에 나섰어야 했다. (약속했던 8000점을 돌파하지 못한 것은) 다 내 잘못이다"고 했다. '무슨 잘못을 했나'고 하자 "경기 중 연습할 시간이 없으니 대기하면서 몸을 확실히 풀었어야 했다. 대기 시간이 짧아 시간적인 압박감도 있었다"면서 "정신이 팔린 것도 문제였다. 세계적인 선수들을 곁에서 보면서 어떻게 경기를 준비하고 플레이하는지 꼼꼼하게 지켜보느라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들이 경기에 임하는 자세를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투척 3종목에서 모두 600점대에 그친 게 8000점 돌파를 발목잡았다. 다른 종목에서는 700~800점대를 기록했다. 그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투척 종목을 배우려고 평소 알고 지내는 투척 대표 선수를 찾아가 야간에 원포인트 레슨도 받았다. 파워가 부족해 힘을 키웠는데 기술이 접목이 안돼 이번에 저조한 기록을 내고 말았다"며 "이제 어떻게 하는지 감이 왔다. 빨리 회복해 투척 종목을 하고 싶다. 몸이 근질거린다"고 했다.
13여년간 10종 경기에 나선 베테랑 김건우가 아직도 배우는 중이라는 것이다. 사실 척박한 환경의 국내 육상 가운데서도 10종 경기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10종 경기 전문 지도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건우는 독학으로 갈고 닦아 경기에 나서고 있는 수준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선택한 10종 경기의 첫 성인 기록이 1998년 기록한 6240점이다. 그후 13년이 지난 지금의 기록이 28일 세운 7860점으로 1620점 늘렸다. 1년에 125점씩 늘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딘 발전 속도는 체계적인 10종 경기 교육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한다면 내가 10년 넘게 피땀흘려 쌓은 기록을 3년 만에 돌파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했다. 이어 "육상 선진국의 어린 선수들은 훈련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보니 금세 기록이 향상된다. 내 기록을 금방 뛰어넘더라. 그런 모습을 보며 참 아쉬웠다"고 했다. 이어 "이번 대회 1위 트레이 하디(미국)와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며 친분을 쌓았다. 훈련 프로그램을 공유하겠다고 하더라. 뛸 듯이 기뻤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8000점을 얘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장담하건대 내년까지 8000점을 확실히 돌파할 수 있다. 이번 대회에서 많은 걸 배웠고 기록도 계속 향상되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한 맺힌 올림픽 얘기도 꺼냈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동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인 그는 올림픽에 한번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올림픽을 앞두고 매번 간발의 차로 출전 기록에 도달하지 못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24점차로 탈락했다. 높이뛰기로 치면 3㎝ 점수다. 내년 런던올림픽에는 반드시 출전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미남으로 혼기가 다다른 그에게 '결혼은 언제 할 것이냐'고 묻자 "런던올림픽 후에나 생각해보겠다"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1500m를 2위로 통과한 전날 밤으로 시간을 돌렸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이 김건우를 연호하는 등 감동의 물결이 메아리친 순간이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사실 에너지를 소진해 1500m에 제대로 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팬들이 열정적인 응원을 보내주더라.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며 "물론 우사인 볼트(자메이카)의 100m 경기를 보러 오신 분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주니 힘을 낼 수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했다. 너무나 뭉클했다"고 말했다. 김건우가 2위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하고 한국기록을 세웠다는 장내 아나운서의 코멘트가 나오자 당시 경기장에는 "대~한민국"이 울러퍼져나오기도 했다.
김건우는 "육상이 붐업되려면 하루 빨리 수영의 박태환,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같은 스타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많은 국민들이 육상의 참맛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며 "국내 육상과 세계의 벽은 분명 존재하지만 계속해서 두르린다면 열릴 것이다. 육상에도 슈퍼 스타가 나오리라 확신한다"고 했다.
대구=국영호 기자 iam90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