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카사노바] 월부책 세일즈맨 (1)
기사입력 2000년 04월 18일 15시 42분
학생데모가 끊이지 않던 80년대 초반의 일이다. 전국 곳곳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는 학
생시위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됐고 서울은 온통 매캐한 최루탄 가스로 뒤덮
였던 격동의 세월이었다.
최연길(32．가명．월부책 세일즈맨)은 강남의 어느 아파트 10층 꼭대기층에서부터 계
단으로 걸어내려가며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 최연길은 최대 불황을 맞고 있었다. 계속되는 데모로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
데 동사무소 직원이나 경찰을 가장한 강도들이 대낮에 가정집을 터는 일이 더러 발
생, 대문을 열어주는 집이 없었다.
그래도 아내와 두자녀를 데리고 살아가려면 월부책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그는 힘없
이 걸어내려가며 계속 초인종을 눌러댔다.
4층까지 내려왔을때다. 오른쪽 집부터 누를까, 왼쪽 집부터 누를까 고민했다. 어느
집을 먼저 눌러야 재수있는 일이 생길까 생각하다 오른쪽 집 현관문이 다른 집과 달랐
다. 아파트 현관문에는 보통 문패, 중국집 스티커 등이 붙어있고 교회에 다니는 집은
교패까지 붙는다.
그런데 그 집엔 아무 것도 붙여진게 없다. `빈집인가?' 갸우뚱거리다 조심스럽게 초
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책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였는데 목욕가운 차림에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었다. 막 목욕을 마친 것 같았다. 최연길은 그러나 그런 차림새보다 문을 열어
주는 집이 있다는게 반가웠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뭐가요?"
"다른 집은 문도 안열고 박대하는데 이렇게 문까지 열고 나와주시니 정말 감사합니
다"하고 인사를 꾸벅 했다.
"아저씨 재미있으시다. 들어와 보세요, 어떤 책이 있나."
최연길은 들어갔다. 집안이 온통 호화판으로 꾸며져 있었다. 소파도 이탈리아제로 보
였다. 푹신한 소파에 앉으니 피로가 확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시원한 음료수를 한잔 내오더니 "어디 어떤 책인지 말씀해 보세요"했다.
최연길은 팜플렛을 꺼내 보이며 "원하시는 책은 다 있습니다. 어떤 분야를 원하시는
지 말씀만 하세요"했다.
"이 많은 팜플렛을 보고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제일 좋은 책이 어떤 거죠? 아주 비싼
걸로."
"비싼 책이라니요?"
"아저씨, 참 답답하시다. 복잡하게 나가지 말고 쉽게 얘기하세요. 저기 저 진열장에
채울 수 있는 고상한 책 없어요?"
"아, 네. 알았습니다."
그녀는 일어나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줄자를 내왔다.
"이걸로 재 보세요."
최연길은 거실의 붙박이 진열장 사이즈를 쟀다. 진열장은 모두 여섯칸으로 돼 있었는
데 칸마다 길이와 높이를 재 적었다.
"여기 들어갈 수 있는 책은 백과사전과 사상전집,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등이
있습니다."
"그걸로 채워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딱딱한 책 말고 심심풀이로 보는 재미나는 책은
없나요?"
"무협소설 같은거요?"
"애정소설도 있어요?"
"좀 야한 것은 어때요?"
"어머 그런 것도 있어요?"
"그럼요, 카사노바전집도 있는데요."
"에이, 농담이시겠죠. 무슨 그런 책이…."
집에 혼자 있는 여자가 아무리 월부책 장사라지만 그래도 외간 남자인데 카사노바 전
집이라는 얘기를 해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것이었다. 최연길은 시선을 책 팜플렛에
서 그녀에게로 옮겼다.
옆에 바짝 달라붙어 앉아 있는 그녀에게서 비누 냄새가 향긋하게 풍겼다. 가운 사이
로 가슴이 절반쯤 드러나 보이는게 알몸에 가운만 걸친 것 같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