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도약 (1)

기사입력 2000년 04월 12일 14시 21분


회사에 출근한 이대진은 곧 조재철에게 불려 회의실로 들어갔다. 오전 8시 30분이었다.

"네가 중국에서 지랄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마주보고 앉았을 때 조재철이 엄숙하게 말했다.

"넌 대기발령이 났어. 아직 발표만 안되었을 뿐이야. 네 대타로 5부 2팀장 홍태환 과장이 오게 되었어. 그놈은 지금 업무 인계를 하고있다."

"그래요?"

"오성호하고 차만석이가 사표를 써 냈는데 내가 갖고 있어. 밑에 놈들도 그럴 기색이지만 백실장은 콧털하나 깜박이지 않아. 나갈테면 나가라는 거야."

이대진이 생각 났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우선 이것 받으시지요."

"이거 뭐야?"

"진짜 웅담입니다. 엄청 비싼겁니다. 곰 두마리분 웅담이 들었어요."

"어, 그래?"하면서 조재철이 박스를 집어들고 내용물을 보려다가 헛기침을 하고는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더니 눈을 치켜떴다.

"이자식아, 넌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야? 우리가 지금 웅담 타령을 늘어놓고 앉아있게 되었어?"

"아따, 주머니에 싹 집어 넣은 건 누군데 그러시오?"

"백실장이 출근하면 넌 통보를 받아, 그렇게 되면 넌 어떻게 할 셈이야?"

"글쎄, 그건 그때 봐서 결정을 할겁니다."

"내가 네 수단을 알아."

눈을 흘겨보인 조재철이 길게 숨을 뱉았다.

"너, 애들 데리고 튈려고 그러지? 네가 가만 있었을 리가 없어."

"조선배를 내가 사장까지 올려 놓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이런 제기."

머리를 흔든 조재철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이대진을 보았다.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그건 네가 인정해 줘야겠다. 네 새끼들한테 물어봐."

"알고 있습니다."

조재철이 방을 나가자 이대진은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이곳은 오히려 중국보다 더한 전쟁터인 것이다. 그쪽은 적이 분명한 싸움이었지만 이곳은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되었다가 이해가 맞지 않으면 저녁 때 등을 돌린다.

그시간에 백경일은 백주현 사장과 마주앉아 있었는데 응접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분가해 나갔던 백경일이 아침 일찍 백주현의 부름을 받고온 것이다. 백주현이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국정원이 회사 인사에 가타부타 상관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내가 아니지만 이번 인사는 취소해라."

그가 시선을 내려깐 백주현의 머리 꼭지를 쏘아보았다.

"어쨌든 너는 이번에도 성급했어. 이대진이 돌아오고 나서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결정 했어야 했다."

"아버님, 이대진은 그자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백주현이 혀를 찼다.

"그것도 능력이다. 넌 왜 그렇게 못하고 나만 피곤하게 만드느냐?"

국정원의 김재선은 아침 일찍 백주현에게 전화를 걸어 이대진이 이번에 중국에서 정부일을 도왔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정부를 대표해서 백주현에게 감사를 드린다고까지 했으니 그 말을 듣고 출근해서 이대진을 자를 수가 없는 노릇이다. 백주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는 포용력이 부족한 것이 포용력이야. 호랑이 부장에 부처님 사장의 조직이 부처님 부장에 호랑이 사장의 조직을 꼭 이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