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강우석 레디고 '투캅스점퍼가 어때서'
기사입력 2000년 04월 10일 14시 36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유명세를 탄 나는 옷 입을 때 유별난 버릇이 있다. 될 수 있는대로 남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화려한 옷은 물론 깔끔한 옷도 피한다. 점퍼에 진바지 차림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게중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입는 옷이 한벌 있다. 돈 주고 산 옷도 아니다. 93년에 `투캅스'를 찍으면서 협찬을 받아 공짜로 생긴 점퍼. 내가 이 점퍼를 상습적으로 입고 다니는 이유는, 그냥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 생각과는 무관하게 내가 입고 다니는 옷에 어떤 의미를 두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투캅스' 이후 내가 연출 또는 제작하는 작품들이 히트를 칠 때면, "투캅스 점퍼 때문이다"란 엉뚱한 해석을 내놓는 이가 있는 것.
이런 황당한 징크스를 만들어낸 이는 지금 씨네락 픽처스의 권영락 대표. 권대표는 `투캅스'를 찍을 당시 제작상무였기 때문에, 내가 입은 것과 똑같은 점퍼를 협찬 받았고, 점퍼에서 흥행의 기가 나온다며 자기도 입고 다녔지만 아직까지 흥행작을 내놓았다는 말은 못들었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단벌 차림이 반드시 편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것은 이런 옷차림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피해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몇년전 서울 종로에서 임대료가 비싼 D빌딩에 사무실을 냈을 때였다. 나는 D빌딩에서 큰 사무실 몇개를 쓰며 비싼 임대료를 지불했지만 섭섭한 감정을 느낀 게 한두번이 아니다. 우리 회사 김세창 상무의 경우,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경비아저씨가 거수경례를 꼬박꼬박 했지만, 대표이사인 내가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면 번번이 "몇층 가시죠?" "누구 만나러 가시죠?"라며 귀찮을 정도로 물어왔다. 그건 바로 나의 허름한 점퍼 탓이었다.
D빌딩 주차장으로 차를 갖고 들어가면, 기사 대기실로 안내를 받거나, "어이, 차 빼!"란 말을 듣기 일쑤.
그래서 하루는 차주인임을 알리기 위해 담배를 꼬나물고 대표이사다운 중후한 표정으로 차를 몰고 주차장을 들어섰는데, 차와 내 행색을 비교해보던 주차관리인의 반응은 변한게 없었다. 그의 시니컬한 표정은 `너네 사장 출장갔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점퍼 차림으로는 술집에서도 대접 못받기는 마찬가지. 큰 차를 몰고가도 파킹을 안해주고, O술집의 웨이터는 내 행색을 보다간, 잘 나가는 사람을 차에다가 모시고 온 사람으로 판단한 듯, 역시 대기실로 안내했다.
얼마전 나는 서울 구기동의 빌라로 이사를 갔는데, 이사 첫날부터 `D빌딩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이사날에도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던 나는 어머니로부터 세탁한 옷을 찾아가라는 전화를 받고나서, 비닐을 씌운 세탁옷 열벌을 찾아 들고, 새집을 찾아갔다. 관리실을 막 통과하는데, 관리인의 "어이!"란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내 옷차림을 체크해보니 트레이닝복.
관리인의 "몇호?"란 물음에 나는 호수를 대고, 관리실을 통과하는 데는 성공했다. 새집을 대충 둘러본 나는 급한 약속이 있어, 곧바로 집을 나섰는데 관리실 앞을 지나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세탁물을 갖고 왔다갔다 하는 `외부인'으로 완전 찍혔구나!
이후 나는 일부러 회사직원을 불러 운전을 부탁하고 뒷좌석에 앉아 있는 등 집주인임을 알리기 위한 상당한 노력을 해야 했다.
이런 내 하소연을 들어본 이들은 옷 잘입고 다니면 될거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옷차림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래도 나는 점퍼를 입어야 마음이 편안하다. 그리고 점퍼차림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 세련된 부자이기보다, 나의 일을 즐기는 영화인이고 싶다. 김치국물이 튈까봐 신경 쓰게 되는 비싼 옷보다, 짜장이 튀어도 티 안나는 때묻은 옷이 더 좋다.
의도적으로 투캅스 점퍼를 나의 트레이드마크로 만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주 먼훗날에도 `점퍼 차림으로 충무로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게 나의 작은 소망이기도 하다.
[P.S] O술집의 웨이터에게 경고한다. 점퍼차림으로 들어가도, 제발 손님 대접 좀 해다오.
[영화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