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31)
기사입력 2000년 04월 07일 14시 18분
검문소 앞에서 버스가 멈춰섰을 때 이대진은 먼저 노인들의 반응을 살폈다. 뒷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노인들이 몸을 굳힌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버스 앞문이 열리면서 제복 차림의 공안 두명이 들어서자 버스 안은 조용해졌다. 공안 한명에게 안내원이 유창한 중국어로 묻더니 곧 승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모두 여권을 준비해 주십시오. 공안이 잠시 가져갔다가 조사 후에 돌려준다고 합니다."
"왜 그러는 거요?"
이대진이 짜증난 듯 묻자 공안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졌다. 그러나 대답은 안내원이 했다.
"무슨 사건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를 용의자 취급을 하나? 버스를 세우고 다 검사를 하게? 관광객들한테 이런식으로 대우하려면 뭐하러 받아들여?"
이대진이 소리를 높여 말하자 공안 하나가 안내원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안내원이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그만해요."
아까부터 이대진의 팔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있던 고윤희가 힘을 주어 흔들면서 낮게 말했다.
"일부러 저자들의 주의를 끌지 마세요."
"노인들한테 기운을 차리라고 한거요."
공안 하나는 벌써 앞쪽에서부터 여권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대진의 여권을 쥐더니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중국어여서 알아듣지 못한 이대진이 공안이 몸을 돌렸을 때 고윤희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한거요?"
"한국인들은 언제나 말썽이라고 했어요."
"개자식이군."
여권을 걷은 공안들은 버스를 내려갔고 버스는 검문소 옆쪽의 공터로 이동했다. 창밖을 내다본 이대진은 공안들이 택시나 승용차도 세우고는 신분증을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은 확인만 하고 그냥 보냈지만 택시에 탔던 세 사람은 신분증을 걷어가더니 검문소 옆으로 옮겨오게 했다.
"한국 여권만 체크하고 있어요."
같이 창밖을 보면서 고윤희가 말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그냥 보내는 군요."
그때 김성복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통로 옆쪽의 노인에게 다가갔다.
"이봐, 술 한잔 하자구."
그리고는 손에 쥐고있던 술병을 노인의 입에다 붙였다.
"또 마누라 생각이야? 어서 마셔."
60도가 넘는 중국산 독주였고 놀란 듯 머리를 든 노인이 술병을 받더니 벌컥이며 마셨다. 경상도가 고향인 정노인이었다.
"아니, 그렇게 마시면 어떻게 해요?"하면서 옆에 앉은 이쁘장한 할머니가 질색을 했지만 정노인은 대여섯 모금을 마시고야 술병에서 입을 떼었다.
"이봐, 나도 한잔 줘."하고 앞쪽의 최노인이 정노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갔다.
김노인이 떠들썩하게 소리쳤을 때쯤 해서는 버스 안의 분위기는 밝아져 있었다.
"임기응변력이 있으신 분이로군."
안심반 감탄반의 심정으로 이대진이 말하자 고윤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포로가 되고나서 50년을 살아 견디신 분들이니까요."
"중공군이 남북통일을 막더니 마지막까지 방해를 하는 구만."
"그러네요."
이를 드러내고 웃은 고윤희가 이대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지만 이대진은 긴장했다.
버스 안에서 노랫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는데 노인들의 청으로 이쁘장한 할머니가 부르는 것이다. 그러자 할머니 서넛이 따라 불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