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카사노바] 가짜 미국 유학생 (1)

기사입력 2000년 04월 04일 14시 25분


인터넷의 어느 채팅방. 야심한 시각이었는데 남녀 이름이 8~9개가 나열돼 있었고 이들은 서로 이상한 용어를 쓰며 대화했다. 그중엔 여자 이름도 3명이 있었는데 진짜 여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남자 네티즌들과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음담패설을 주고 받았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채팅방에 들어가면 저속한 말을 서슴지 않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중 남자 한명과 여자 한명은 가급적 점잖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둘은 `귓속말'로 빠져 나갔다.

둘만의 대화를 나눴다. 미국 유학생이라는 윤명훈(26·가명)과 보습학원 강사라는 전영숙(25·가명). 둘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논하고 스피노자의 철학을 논하더니 이제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겠다며 서로 E-메일을 알려주고 대화를 마쳤다.

둘은 다음날 수시로 E-메일을 주고 받았고 밤에는 PC통신으로 대화를 나눴다. 비록 얼굴 없는 대화였지만 둘은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친숙한 사이로 발전했다.

윤명훈은 지성미가 풍기는 전영숙에게 마음이 끌렸고 전영숙은 해외 유학이 꿈이었기에 호감을 샀다. 대학을 졸업한뒤 유학을 가려했으나 집안형편이 어려워 취업을 택했다. 형편이 풀리면 유학의 꿈을 이루려던 차에 미국 유학생을 만났으니 관심을 갖는건 당연한 일.

며칠뒤 둘은 핸드폰 번호를 교환, 육성으로 대화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만났다.

"어떤 분일까 몹시 궁금했는데 만나보니 미인이시네요."

전영숙은 뭔가 숨겼던 것을 들킨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인터넷 채팅을 해 데이트를 한다는게 부끄러웠던 것이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만나서 반가워요"하고 인사했다.

그동안 PC통신이나 핸드폰으로 대화를 나눌때와 달리 왠지 서먹서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윤명훈에 의해 금세 바뀌어졌다.

"전선생님은 역시 한국적입니다. 미국에선 처음 만난 남녀들이 아무 꺼리낌없이 깔깔대며 어울리지요."

이 말에 전영숙은 친숙하게 얼굴없는 대화를 나누던 때의 분위기를 찾으려고 애써 노력했다.

"학생들과 지내기 재미있으세요?"

"네."

"미국애들은 워낙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고생이 많지요."

"강사생활을 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2년됐어요. 그런데 윤명훈씨는 무얼 전공하세요."

"경영학입니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거든요."

"어떤 사업이신데요."

"가구회사를 운영하십니다. 처음엔 국내에서만 팔다 미국으로 수출을 하고 계시지요. 요즘은 국내 인건비가 비싸 공장을 러시아에 건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하는 바람에 제가 뒤늦게 유학을 가게 된 겁니다."

"저도 실은 유학을 가는게 꿈이에요."

"아, 그러세요."

대화는 이렇게 풀려나갔다. 유학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주립대가 등록금이 싸다면서요?"

"미국의 각 주에는 여러개의 주립대가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시설이 좋고 학비가 싼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렴한 학비는 그 주의 거주민들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지역 거주자나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2∼3배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합니다. 그래도 사립대에 비하면 싼 편이지요. 물론 주립대 중에서도 사립대보다 훨씬 비싼 등록금을 받는 곳도 있고 도시를 벗어난 시골에는 학비와 생활비가 싼 사립대도 있습니다."

윤명훈의 입에선 미국 유학에 대한 얘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