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24)

기사입력 2000년 03월 30일 14시 38분


열이 뻗친 박장호가 방을 나갔을 때 최학진이 찌푸린 얼굴로 문쪽을 보았다.

"저 친구 말이 사실일까?"

"이대진이 혼자서 여권을 만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노정수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누군가가 돕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요."

"국정원이 아니란 말이야? 아니면 의심이 간다는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자넨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야."

최학진의 분통이 이제는 노정수를 향해 쏟아졌다.

"책임질 말은 절대로 꺼내지를 않는군."

당황한 노정수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대진은 잠적하고 있지만 한국으로 연락은 할 것입니다. 한국 쪽에다 압력을 넣는 방법이 현실적으로는."

"그건 국정원에서 할 일이야."

말을 자른 최학진이 어금니를 물었다.

"저놈, 박장호를 어떻게든 내 몰아야겠어. 도무지 비협조적이야."

대사관을 나온 박장호는 휘적이며 걷다가 이번에는 선물가게 안으로 쑥 들어갔다.

공중전화기 앞에 선 그는 전처럼 입구 쪽을 바라보며 다이얼을 눌렀다. 이대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북한측이 대사관에 항의를 해왔소. 지금 대사관이 시끄러워졌소."

그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잡힌 놈이 알고 있는 일을 모두 자백한 모양이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갑니다."

"그렇다면 공안당국에도 정보를 주었겠군요?"

이대진이 묻자 박장호는 길게 숨을 뱉았다.

"당연하지요. 한국 관광객에 대한 검문이 철저해질 것입니다. 특히 노인들에게 대해서는 더욱."

"할 수 없지요. 밀고 나갑니다. 우리는."

"그런데 장용수한테서는 연락이 왔습니까?"

"아직."

"그놈들이 차라리 동포가 아닌 것이 나았어."

잇사이로 말한 박장호가 서두르듯 말했다.

"다시 연락 드리지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장호는 관광객처럼 서두르듯 말했다.

"다시 연락 드리지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장호는 관광객처럼 선물가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도 아침의 장용수와 이대진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고있는 것이다.

박장호와의 통화가 끝난지 10분쯤 지났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탁자 위에 놓인 고윤희의 핸드폰이다. 고윤희가 서둘러 핸드폰을 귀에 붙이더니 이대진에게 눈짓을 했다.

장용수였던 것이다. 이대진이 핸드폰을 건네 받았을 때 장용수가 말했다.

"이선생, 합의합시다. 170만 위안을 내시오. 30만 위안을 깎아 드리는 거요."

"내가 깎아야겠어. 100만 위안을 받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이대진이 소리치듯 말하자 고윤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도 바쁜 사람이야. 앞으로 한 시간당 10만 위안씩 내려가는 거요. 그래서 오늘 밤이 지나면 굿바이야. 난 이제 이런 더러운 수작에 진저리가 났어."

"이보쇼. 이선생."

"한마디만 더하지. 넌 동포도 아니고 개새끼야. 그래서 너에 대한 정보를 공안은 물론이고, 북한측에도 모조리 건네 줄테니까. 최삼동이 말하지 않은 사실도 있을테지."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으므로 고윤희가 다가와 섰다. 이제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선생님, 괜찮겠어요?"

"절대로 괜찮습니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은 이대진이 고윤희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돈과 노인들을 교환하고나서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아졌군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