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이성진 '인터넷 세상의 극단적 폐쇄성'
기사입력 2000년 03월 28일 13시 52분
인터넷 세상에서 살다보면 갖가지 소문과 사건을 접하게 된다.
필자가 하는 일이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과 소식을 다루는 것이라, 어떤 사이트가 문을 닫았네, 어떤 게임에서 사이버시위가 일어났네, 어젯밤 모 게시판에서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유명한 논객이 나타났네 하는 등 실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알게 된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실세계를 살아온 경험에 의해 해석, 평가할 수 있지만 때때로 오프라인에 익숙해진 머리로 판단하기에는 아주 어려운 사건이 일어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지난해 패러디 신문 딴지일보 게시판에서 발생한 네티즌 집단 이주 사건이 그렇다.
딴지일보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무려 20명이 넘는 논객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이들은 딴독투(딴지일보 독자 투고란)에서 만나 서로 안면을 익히고 `딴쪽방'이라는 일종의 사랑방 비슷한 게시판으로 몰려가 의기투합을 하는 듯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딴지일보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대체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추적해본 결과 이들은 주소를 외우기도 힘든 홈페이지를 하나 마련하고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둥지를 틀고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홈페이지를 검색엔진에도 등록하지 않고 주소도 일부러 아주 어렵게 만들어 외부의 접근을 차단한 다음 행여 찾아올 외부 손님들을 막기 위해 홈페이지 대문을 비밀번호로 잠궈놓았다.
더욱이 이 비밀번호가 외부로 유출되지나 않을까 염려해 2주일마다 그 번호를 바꾸는 등 보안에 철저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대체 이들은 이곳에서 뭘 하는 걸까?
혹시 국가전복 음모를 짜는 것이나 아닐까 생각했던 필자의 상상과는 달리 이들은 딴지일보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무단 침투를 감행한 필자가 실망을 한 것은 물론이다.
이들은 집단이주에 대해 단지 `방해받는 것이 싫어서'라는 간략한 답변을 했다. 정말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근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모 프리섹스 온라인 조직인 ISM(가칭)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조직답게 전국적인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오로지 E-메일만을 통해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있으며 오프라인 모임은 갖지 않는다. E-메일도 누군가의 감청망을 피하기 위해 외국의 모 웹메일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이들의 활동이 드러나는 시점은 오로지 모 채팅 사이트에서 한 달에 한번 갖는 정팅.
이 조직의 총책인 gdbg님(가칭)은 모임의 모든 회원이 영문으로 된 아이디를 갖고 있으며 이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무질서한 조합으로만 만들기를 권유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처럼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역시 어떤 불법적인 모임이나 대단한 것을 하기 위한 목적을 갖지는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만의 언어와 생각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할 뿐이었다.
딴독투의 네티즌이나 얼마전 사회적 파문을 몰고온 프리섹스 온라인 조직 등 모두 공통적이라면 자신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흔히들 오픈마인드로 알려진 네티즌 중에는 이같이 극단적인 폐쇄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이들의 심리와 사고방식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실세상보다 인터넷에서 더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인터넷 세상의 축복인지 불행인지는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데일리클릭 보도국장 master＠dailyclic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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