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21)

기사입력 2000년 03월 27일 14시 27분


"장용수가 거처를 옮겼다는 데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고윤희가 이대진을 바라보았다.

"최삼동이란자가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아마 북한 사냥꾼들한테 잡힌 것 같다고 해요."

고윤희의 통화를 옆에서 들은 터라 이대진도 대충 내용을 안다. 그가 입맛을 다셨다.

"외출시키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보냈군. 더러운 자식."

오후 6시였다. 고윤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북한 사람들한테 잡히면 털어놓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여권을 만들어 준다는 것도 이젠 다 알고 있겠는데요."

"하지만 탈출 방법을 모를 것 아니요? 밀고 나가는 수밖에."

내일 오전 11시경에 관광객들은 베이징에 도착하는 것이다. 여행사에서는 이미 동양 호텔에 40명이 투숙할 방까지 예약해 놓았다.

관광객 35명과 노인 5명은 호텔에서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대진과 고윤희는 모레 아침에 버스가 출발할 때 동승할 계획이었다.

"최삼동이 혹시 노인들의 새 이름을 알고있지 않을까요?"

고윤희가 묻자 이대진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알려고 했다면 알 수 있겠지. 노인들이 공부하는 어깨 넘어로 들여다 볼 수도 있을테니까."

"불안하군요."

"나는 장용수가 최삼동의 몸값을 더 내라고 할 것 같아서 걱정이요."

"그렇군요."

눈을 크게 뜬 고윤희가 이대진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충분히 그럴만한 위인이에요."

"미리 50만 위안쯤 더 준비하고 있어야겠소."

"그럼 150만 위안이네요."

눈을 둥그렇게 뜬 고윤희가 침을 삼켰다.

"선생님은 부자세요?"

"회사에서 삥땅을 친 돈을 이런데에 쓰는 겁니다."

"삥땅이 뭔데요?"

"쉽게 말하면 사기, 아니 도둑질을 한 돈이지."

이대진은 더 설명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설명이 길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깜박이며 이대진을 바라보던 고윤희가 말했다.

"장선생한테서 들었어요. 이선생은 지금 회사에서도 곤란한 입장이라고 하던데요."

"사주 아들이 날 파면시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지."

"괜찮겠어요?"

"나도 맞받아 칠 작정이요. 내 부하들이 지금 작전 중이지."

소파에 등을 붙인 이대진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고윤희씨는 결혼 했습니까?"

"아니, 아직 미혼입니다."

머리까지 저은 고윤희가 무릎을 더 모으고는 드러난 부분까지 손으로 덮었다.

"이선생님은요?"

"나도 아직."

"애인은 있겠지요?"

"없어요."했지만 이대진의 머리 속에 여자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끝부분에서 김경희와 정현희의 얼굴이 겹쳐졌으므로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북한의 사냥꾼 두목인 것이다.

오피스텔 안에는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가 분위기만 더 어색해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대진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오늘부터 고윤희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숱한 여자를 겪었지만 이런 분위기의 여자는 처음이었고 이런 상황도 처음이었다. 고윤희와는 부부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