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영어와 전쟁중인 일본의 샐러리맨들
기사입력 2000년 03월 26일 16시 23분
요즘 일본은 졸업시즌이다.
그래서인지 시내를 나가보면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여학생들을 자주 만난다. 3월 중에 일제히 시작되는 일본대학의 졸업식에는 남자는 양복정장을 입지만 여학생들은 대부분 기모노를 입는다.
일본은 3월에 시작하는 우리와는 달리 4월과 10월에 학기가 시작된다. 때문에 일본의 학생들은 현재 봄방학으로 대학의 개강은 내달 10일쯤 한다.
마찬가지로 기업에서도 1년 결산이나 인사이동은 모두 3월에 하고 있다.
말하자면 1년의 총마무리를 12월이 아닌 3월에 하는 것이다. 덕분에 값이 싸고 음식이 맛있는 이자카야(학생이나 샐러리맨들이 잘 가는 술집)는 전근가는 동료직원들의 송별회와 졸업파티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올해 졸업생들의 마음은 흥청거리는 이자카야처럼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번듯한 직장을 구한 이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본 신문보도에 의하면 올해 대학의 취업난은 최악의 상태라고 한다. 졸업예정자나 기졸업자 중 아직 취직이 결정되지 않은 이가 17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게 대학관계자들의 얘기다.
게다가 현재 일본의 기업은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 취직이 어렵다. 때문에 대학재학 중 미국이나 영국, 호주에 가서 1년씩 영어연수를 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전에 발표된 아시아국가들의 영어능력 평가에서 일본은 거의 꼴찌에서 맴돌아 큰 충격을 안겨 줬다.
그동안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아시아의 리더임을 자임하던 일본이 자국보다 훨씬 못사는 인도에게 1위를 내주고 파키스탄, 중국, 한국에도 뒤지는 하위급 성적을 내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영어를 제2공용어로 채택하고 공공 간행물이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일어와 영어로 작성하도록 의무화시키는 내용의 보고서가 오부치 일본수상에게 제출됐다.
기업은 한 술 더 떴다. 영어실력이 나쁘면 승진에 지장이 있다고 대기업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를 한 것이다. 일본 대졸 신입사원의 평균 토익점수는 440점.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기업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그래서 일본 IBM은 내년 3월부터 토익점수가 600점을 넘어야 과장이 될 수 있고 차장급은 730점을 얻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러한 제도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회사도 31개나 된다. 99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도요타 자동차의 경우는 계장이 되려면 600점 이상을 맞아야 한다. 마츠시타전기는 주임이 450점, 해외관련업무종사 사원은 650점이 커트라인이다. 31개의 기업 중 과장급 승진은 대체로 500점대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일본의 대표적인 외국어 학원인 ECC나 전철역 앞에 전국적인 체인망을 구축하고 있는 노바(NOVA)영어학원은 1년짜리 회원권을 끊어 저녁에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중년의 샐러리맨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또한 기업들은 이같은 샐러리맨들의 의욕을 북돋워 주기 위해 높은 토익점수를 받아오면 상여금 또는 매월 특별수당을 점수별로 주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남성 샐러리맨보다는 여성사원의 영어실력이 점점 더 월등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여성사원들의 경우 죽기살기로 영어공부에 매달린다는 것. 남성들의 경우 퇴근후 회사와 관련된 직간접 약속이 많아 학원결석이 많은 반면, 여성은 이같은 부담이 적어 영어 공부에 매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입사원들은 대개 대학재학 중 해외언어연수를 다녀왔기 때문에 웬만한 대화정도는 충분히 할 수가 있어 30∼40대의 샐러리맨들은 가슴을 조이며 위기감에 떨고 있다.
"거기에다 컴퓨터까지 능숙하지 못하면 진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이 돼 버렸어요. 말이 직장이지 우리같이 애매한 중년 샐러리맨은 정말 하루하루가 전쟁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
미츠비시 상사 영업부에 근무하는 한 샐러리맨의 고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