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18)

기사입력 2000년 03월 23일 13시 37분


시내의 도로가에 내려졌을 때 고윤희가 힐끗 달려가는 장용수의 차에 시선을 주었다. 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내성의 번화가여서 행인들이 많았다.

"100만 위안이 준비되겠어요？"

이대진이 머리만 끄덕이자 고윤희가 쓴 웃음을 지었다.

"박장호씨 한테서 이야기는 대충 들었지만 특별한 분이세요."

"뭐가 특별 하다는 거요？"

"개인돈으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말이요."

"뭐,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도 있으니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계단에서 발을 헛딛어서 죽습니다."

택시가 왔으므로 그들은 뒷좌석에 올랐다. 고윤희가 유창한 북경어로 행선지를 말하자 택시는 기운차게 달렸다. 오피스텔 뒤쪽 길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중국인 남녀처럼 보이기 위해 고윤희가 주의를 준 것이다. 뒷골목을 돌아 오피스텔 안에 들어섰을 때 고윤희가 말했다.

"저는 사진 현상때문에 나갔다가 아침 일찍 오겠어요. 여권이 급하거든요."

"내 새 이름은 뭐요？"

"그건 아직 저도 모르겠어요."

문의 손잡이를 잡은 고윤희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고른 이가 하얗게 드러나는 밝은 표정이 되어서 딴 사람같이 보였다.

"하지만 이선생은 어떤 이름이 되건간에 금방 적응이 되시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고윤희가 방을 나가자 이대진은 문의 자물쇠를 채웠다. 공안 당국에 수배된 몸이어서 그도 다른 여권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들에게 가기 전에 이곳에서 사진부터 찍었다.

소파에 앉은 이대진은 어금니를 물었다. 장용수는 이쪽에서 서두를 수록 노인들의 값을 올렸다. 마치 야수에게 약점을 보인 짐승 꼴이어서 끈질긴 공격에도 어쩔수가 없이 당하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추가수당으로 20만 위안을 얹더니 이제는 특별수당으로 50만 위안을 떠넘겨서 몸값이 100만 위안까지 되었는데도 이쪽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손을 뻗쳐 전화기를 쥐었다.

오성호와 연락할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신호음이 두번 울렸을 때 오성호는 전화를 받았다. 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전화기 옆에서 기다린 것 같았다.

"보스, 5부 2팀장이 특수팀장으로 온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백경일은 이제 차만석도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만석을 부르지도 않아요."

그가 쏟아붓 듯 말을 이었다.

"기획실의 차수환 대리한테서 들은 정보니까 틀림 없습니다. 저하고 차대리는 아마 공장으로 발령이 날 것 같습니다."

차수환은 지난번에 만보기계에서 되찾아온 5000만원을 송두리 채 넘겨받은 이후로 이대진의 심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대진이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첩첩산중이다.

"발령은 언제 난다는 거야？"

"이달 말입니다."

"그렇다면 열흘 남았군."

"보스, 언제 오십니까？"

"모레 출발이니까 서울에 도착하려면 5~6일쯤 걸릴 것이다."

그러자 수화기에서 오성호의 한숨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보스, 우리로서는 손을 쓸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는 백경일과 나와의 단판 승부가 되었군."

이대진이 혼잣소리로 말했지만 오성호는 들었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스, 방법이 없을까요？"

사주 아들과의 승부인 것이다. 다시 어금니를 물었던 이대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해보자. 잘들어. 오대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