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17)
기사입력 2000년 03월 22일 14시 38분
"자, 그럼 이쪽으로 모여 앉으세요."
카메라를 내려놓은 고윤희가 웃음띤 얼굴로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고윤희는 방금 다섯 노인들의 여권용 사진을 찍은 것이다.
노인들이 말 잘듣는 학생처럼 모여 앉았을 때 고윤희가 정색하고 말했다.
"이제부터 할아버지들은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되는 거예요. 같이 여행하실 관광객들한테도 절대로 탈북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안됩니다."
가방을 연 고윤희가 다섯묶음의 서류를 꺼내더니 노인들에게 물었다.
"고향이 전라도이신 할아버지는 누구시죠?"
"납니다."
긴장한 김성복 노인이 손을 들자 고윤희가 서류 하나를 건네 주었다.
"지금부터 할아버지 이름은 이복남입니다. 여기에 할아버지의 가족관계와 경력, 그리고 일상적인 대화에 필요한 내용들이 적혀 있으니까 이틀동안 외우셔야 해요."
고윤희가 나머지 네 노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고향이 경상도라는 할아버지가 두분 계셨지요?"
그러자 노인 둘이 손을 번쩍 들었고 고윤희는 서류를 나눠주었다.
"이름부터 외우세요. 다른 것은 외우기 쉽도록 정리해 놓았습니다."
서울과 충청도가 고향이라는 두 노인에게도 서류를 나눠 주었을 때 구석에 잠자코 서 있던 장용수가 이대진을 보며 웃었다.
"철저하군요. 물론 여권은 정식으로 한국정부가 발행한 것이겠지요?"
이대진이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머리만 한쪽으로 기울였으나 장용수가 제말에 제가 대답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이런 방법이라면 공안도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노인들은 벌써부터 전등 밑에 모여앉아 열심히 서류를 읽고 있었다. 고윤희가 장용수에게 다가와 섰다.
"모레 저녁에 노인들을 모시러 올테니까 그때까지만 잘 부탁합니다."
"염려하지 마시오."
선뜻 대답한 장용수가 다시 웃었다.
"물론 돈을 받아야겠지만 말입니다."
"그때까지 선생님의 동료 분들도 외출하지 않도록 하세요."
"별걸 다 상관하시는 군."
"북한 수색조가 조선족을 중심으로 수색하고 있는 걸 아시죠? 한사람이라도 걸리면 이제까지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갈테니까요."
"이틀동안 꼼짝않고 있을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이제는 정색한 장용수가 고윤희를 바라보았다.
"혹시 한국 기관에서 오셨소?"
"그건 아실 필요 없어요."
차갑게 말한 고윤희가 이대진에게 눈짓을 했다.
"이젠 가시죠."
창고의 마당에 세워진 승용차에 그들이 탔을 때 다시 검정색 테이프가 붙여진 안경이 씌워졌다. 밤 12시 30분이었다. 차가 덜컹거리며 굴곡이 심한 길을 달려 갈 때 옆에 앉아있던 장용수가 말했다.
"이선생, 아무래도 우린 베이징을 떠나야할 것 같소. 노인들을 보내고 나서 동료들도 다 제 갈길로 돌아갈텐데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소문이 납니다."
이대진이 머리를 돌렸으나 장용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장용수가 말을 이었다.
"주의를 주었지만 나눠준 돈을 안쓰고는 배겨내지 못할테니까 말입니다. 소문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요."
그리고는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특별수당을 더 얹어주셔야 겠소.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게 될 줄은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옆자리의 고윤희도 긴장한 듯 몸이 굳어졌고 장용수의 말이 이어졌다.
"50만 위안을 추가시켜야겠소. 노인들을 찾으려면 100만 위안을 가져오시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