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강우석 레디고 '남의 입장에 한번 서보라'
기사입력 2000년 03월 20일 14시 26분
나는 요즘 집에 들어가기 싫다. 그래서 귀가시간을 최대한 늦춘다.
잘 방이 없어서도 아니고,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아니고, 집이 멀어서는 더욱더 아니다.
내가 너무 바쁘게 돌아다니는 탓에 얼굴 볼 시간이 없다며, `애정결핍' 현상으로 울부짖던(?) 마누라도 요즘엔 나에게 정말 잘한다.(무관심인지, 포기한 건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왜 집에 들어가기 싫을까?
평소 집에 들어갈 때 벨을 누르지 않고, 열쇠로 직접 열고 들어가는 이상한 습관을 갖고 있는 나는 요즘엔 한술 더떠 마치 도둑처럼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조심조심 내 방으로 들어간다.
이유는 단 하나.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아들이 무섭다. 내 아들 윤성이는 이제 갓 한돌을 지났지만, 나는 그 아들이 두렵다.
깨어있는 그를 보면, 귀여운 건 5초 정도. 이후엔 공포 그 자체다.
그는 모든 게 자기 기분대로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평소 잘 갖고 놀지도 않던 장난감을 잠깐만 손대도, 부모건, 할머니건, 고모건, 이모건, 모두 그에게 구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장난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가 잠을 잘 때엔 누구도 방해해선 안되지만, 잠 안잘 때엔 엄마나 아빠가 자는 걸 용서하지 않는다. 아무리 배부른 상태라도, 남이 무얼 먹고 있으면 꼭 뺏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또 자기가 뭘하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자기에게 주목하지 않으면 `깽판'을 치고 만다.
만 한살박이 아이가 어쩌면 이토록 독재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까.
그래서 난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다.
아이가 집에 없을 때면(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놀때 등), 아이에 대한 걱정보다 왜 그렇게 마음이 편한지 모를 정도인데, 그러다가 문득 나는 `혹시 이 아이의 독선이 나를 닮은 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았다.
아이가 없을 때 내게 찾아온 평화는, 마치 내가 해외출장중일 때 회사 직원들이 느끼는 평안과도 같은 게 아닐까?
해외출장을 가려고 회사를 나설 때 "다녀오십시요!"라고 외치는 직원들의 표정을 보면, `정말 내가 출장을 꼭 가야 하나'라고 속으로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공항으로 출발하려다가, 놓고 온 물건이 있어 다시 회사로 들어갔는데,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웃고 있는 직원들의 얼굴을 목격했을 때의 기분이란!
혹자는 사무실을 들어설 때 직원들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잠겨진 내방에 내가 있음을 직감한다고 말하곤 한다.
내가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게 어찌 회사내 뿐이겠는가?
영화계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강우석의 개입설' 내지 `강우석의 응징설'을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내가 그렇게 잘나가는 사람인지 스스로 놀란 적도 많지만….
하지만 나는 한살박이 윤성이를 보면서, 나를 반성하고 있다.
그 꼬마는 자신이 멋대로 행동함에 있어,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고통을 받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고, 이에 따라 `돌맞은 어른 개구리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영화계에서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행동하는 동안, 회사 안팎에서 혹시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내 아들, 윤성아! 우리 부자는 모두 반성하기로 하자.
이제부터 남들을 배려하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씨를 기르자꾸나.
[영화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