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유재순 지금 일본은… 이종범씨께(3)
기사입력 2000년 03월 14일 14시 37분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운동밖에 몰랐고 그래서 늘 밖에서만 지냈습니다. 반면 아내는 가정밖에는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여인은 늘 혼자 감내해야 했습니다. 물론 불만도 있었습니다. 외로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지요. 일본에서 운동하는 지아비를 둔 이상은 모든 걸 인내하고 견뎌야 했습니다. 모든 스포츠맨들의 가정은 그러했으니까요.
그런 아내를 남편은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안심하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神)은 이 부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쓰러진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했지만 그 때는 이미 암세포가 몸 전체로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남편은 고민했습니다. 운동을 그만두고 투병하는 아내 곁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 운동을 해야 하는가. 그 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진정 내게 미안하다면, 나를 기쁘게 하고 싶다면 우승을 하십시요. 그것만이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 남편은 계속 운동장에 섰습니다. 아내가 걱정되어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어도,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보고 싶어도 그라운드에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선수가 아닌 감독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일로 집중력이 필요한 운동분위기를 흐트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2년여의 투병끝에 감독의 아내는 홀로 갔습니다. 감독은 운동장에서 아내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 알려진 순간 감독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습니다.
그 때 일본국민들은 TV를 봤습니다.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삼키는 감독의 모습을. 이같은 감독의 모습에 일본인 모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취재기자들까지 말입니다.
이종범씨!
이 감독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당신과 갈등을 빚고 있는 호시노 감독입니다. 왜 그 사람이라고 아내 곁에 있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선수들이 있었으며 또 그에 상응하는 돈도 받았습니다. 속절없이 아내를 떠나보낸 후, 몇 번이고 울다 지쳐 쓰러지는 호시노 감독을 보면서 한국인인 저는 칼날같은 충격이 전해오는 걸 느꼈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분을 위해 부부애마저 사정없이 내던져야 하는 프로세계의 비정함과 잔인하기까지 한 일본인들의 책임감을 본 것입니다. 거기에 일본의 저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종범씨!
더이상 아버님 병환을 핑계대지 마십시요. 그 변명이야말로 당신을 추락의 지름길로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구단으로 이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겁니다. 유교사상이 뿌리깊은 한국인들은 이종범씨의 효성이 갸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본 프로야구세계에서도 그같은 평가를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인 일입니다. 그렇게 효심이 깊으면 야구 그만두고 아버지 곁에 있으면 될 게 아니냐는 한 일본기자의 말은 단지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일본인 전체의 시각을 반영한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니치에 소속돼 있는 이상 더이상 구단이나 감독에 대해서 불평해선 안될 것입니다.
몇 년 전 지금은 은퇴한 스모의 외국인 선수 고니시키가 뉴욕 타임스에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가 좋은 성적을 올리고도 결국은 요코즈나(천하장사에 해당)에 등극하지 못한 일은 당신께 좋은 타산지석이 될 것입니다. 고니시키는 현재 스모계를 떠난 자유인인데도 불구하고 스모계에 대한 험담이나 불평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일본사회의 속성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종범씨!
억울하면 속으로 삭히고 억울한 만큼 더 뛰십시요. 운동선수는 자신에 대해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운동실력으로 말합니다. 프로선수라면 더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호시노 감독이 당신을 2군으로 내려보낸 것은 가을 캠프에 불참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이한' 의식구조가 못마땅해서였을 겁니다.
주제넘게도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침묵하고 실력을 연마할 때라고요. 그것만이 양국의 의식차이로 상처받은 당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한국의 대스타다운 명성을 되찾는 길일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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