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8)
기사입력 2000년 03월 12일 16시 40분
그 시간에 정현희는 방에서 서울의 차만석 대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오늘로써 나흘 째 였으므로 차만석의 말 끝에는 돌아올 때가 되어 간다는 분위기가 풍겨졌다.
그에게 이쪽의 절박해진 상황을 말해 준다면 펄쩍 뛰면서 난리를 칠 것이 분명한지라 정현희는 별일 없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본사와 통화를 하고나니 가슴이 조금 개운해졌다.
자신의 표현대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든든한 우군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으므로 시계를 들여다본 정현희는 문으로 다가갔다. 11시 20분이었다.
"누구세요?"
11시 약속을 나간 이대진은 아닐터여서 영어로 물었을 때 문밖에서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요."
투박한 영어였다. 문에는 보안경도 없는 터라 멈춰선 정현희가 다시 말했다.
"누군지 말해요."
"공안이요."
놀란 정현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요?"
"당신 한국인 정현희씨 맞습니까?"
"그런데요?"
"문을 여시오. 여기 호텔 종업원하고 같이 왔으니까."
"그럼 기다려요. 내가 호텔에다 확인을 해볼테니까."
정현희는 어떻게 탁자까지 돌아와 전화기를 집었는지 기억에 없다. 교환을 통해 지배인과 연결이 되었을 때까지 10초도 안걸렸지만 1시간도 더 지난 것 같았다.
"여긴 612호실인데요. 밖에 공안이라는 사람이 와 있는데."
정현희가 숨가쁘게 말하자 지배인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맞습니다. 조사 할 일이 있다니까 협조해주십시오."
부드러운 지배인의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놓인 정현희는 문으로 다가가 자물쇠를 벗겼다. 그러자 제복을 입은 공안 두명이 반쯤 열린 문을 제치면서 들어섰다. 거친 기세여서 정현희는 한쪽으로 비껴섰다.
"짐을 싸시오."
서툰 영어로 말한 공안 하나가 정현희를 쏘아보았다. 다른 공안은 화장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고 종업원은 문 옆에 우두커니 서있다.
"무슨 말예요?"
놀란 정현희가 묻자 공안은 목소리를 높였다.
"오후 1시반 비행기를 타야한단 말이야. 짐을 놓고 가려면 그냥 가든지, 지금 공항으로 출발해야돼."
단어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정현희는 내용은 분명히 알아들었다. 이를 악물었던 정현희는 공안을 마주 보았다.
"내가 왜요?"
"난 명령을 받았을 뿐이야. 자,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아니면 공안국으로 갈까?"
"대사관에 전화부터 하겠어요."
눈을 치켜뜬 정현희가 두 손을 허리에다 짚었다. 이제는 화가 겁을 눌렀다.
"내가 추방당할 이유가 없어요. 분명한 이유를."
그렇게까지 말했던 정현희는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시선도 내렸다. 공안이 나타났을 때부터 가슴이 울렁거린 이유를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탈북자 문제 이외에는 이런일이 일어날리가 없다. 그때 공안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해보라구. 한국 대사관에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전화기로 다가간 정현희는 공안에게 이대진도 같이 추방되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다이얼을 눌렀을 때 다행히 노정수는 자리에 있었다. 노정수는 정현희의 다급한 이야기를 듣더니 긴 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만한 것이 다행입니다. 돌아가세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