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1)
기사입력 2000년 03월 03일 15시 18분
이대진이 베이징 주재 한국 대사관의 노정수 영사를 만난 것은 다음날 오전 11시였다. 대사관 근처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마주 앉았을 때 노정수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는 외교부에 있는 안동성이 소개시켜준 인물이다.
"탈북자들을 만나셨다구요?"
전화로 대충 이야기를 한터라 그가 불쑥 물었다.
"그렇습니다. 일곱이 탈출했는데 지금은 다섯이 남았다고 합니다. 저는 한분 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조선족이 보호하고 있는데 일인당 5만 위안씩 추가됩니다."
"혹시 사기꾼들 아닐까요? 그런 놈들이 많거든요."
"제가 만난 한 분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대진이 김성복 노인의 신상명세가 적힌 쪽지를 꺼내어 그의 앞에 놓았다.
"확인해 보시지요."
"안과장한테서 이야기는 들었지만."
쪽지를 집어든 노정수가 이대진을 보았다.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눈동자가 쉴새 없이 움직여 불안정한 분위기가 풍겨졌다.
"이런 일에 나서시는 이유는 뭡니까?"
"이유라니요?"
이대진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왜요? 이상하게 보입니까?"
"다섯명이면 25만 위안이나 되는데 그 돈을 마련하실 수 있습니까?"
이대진은 노정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안동성은 노정수가 고시 동기라고 했다. 그러나 노정수의 성품이나 이 일에 대한 반응은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커피잔을 든 이대진이 정색했다.
"그 문제는 나한테 맡기시고,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어쨌든 한국으로 모셔 가야겠지요? 그 방법만 만들어 주십시오."
"보고부터 해야지요. 이건 여간 민감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 일을 내가 오기 전부터 알고 계셨지요?"
이대진이 불쑥 묻자 노정수의 눈동자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눈썹 사이는 좁혀졌다.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장난 전화가 많이 오거든요. 그리고 탈북해서 무조건 대사관으로 달려 오는 것도 문제란 말입니다. 한중관계에 있어서…."
"그래서 국제적십자사나 미국대사관으로 가라고 했습니까?"
노정수의 말을 자른 이대진이 차갑게 다시 물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런 말을 한놈이 대사관에 있다고 하더군요.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자 노정수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이대진은 조금전부터 낙심하고 있었다.
노정수는 김성복 노인의 신상명세를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쑤셔넣은 것이다. 그리고 보고부터 한다면 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노정수가 탈북자들에게 미국대사관으로 가라고 한 장본인 일지도 몰랐다. 노정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이대진을 내려다 보았다.
"연락드리지요."
"내일 나머지 네 분의 신상명세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따라 일어선 이대진이 말을 이었다.
"슬슬 언론 쪽에 이 일을 알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일날 소리는 하지도 마십시오."
펄쩍 뛰듯이 놀란 노정수가 목소리까지 떨었다.
"그러면 될 일도 안됩니다. 절대로 그쪽에 발설하지 마세요."
"그럼 기다리지요."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이대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해본 소리였지만 효과는 있었다.
노정수에게 짐을 지운 것이다. 이제 무시하고 넘어가지는 못할 터였다.
[계속]
